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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신문 잡지 기자로 조직된 무명회(無名會)의 발의와 각계방면의 응원으로써 계획된 조선기자대회는 …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야 드디어 15일로써 대회의 첫 막을 열게 돼 전 조선에 흩어져있는 가지가지의 필봉(筆鋒)은 때를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고 힘을 뭉치고 걸음을 가지런히 하야 조선의 중앙 서울에 모이게 됐다.”―동아일보 1925년 4월 15일자》

일제-군부-신군부 언론통제 시도에 펜과 입으로 맞서


1925년 4월 15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사상 최초로 열린 조선기자대회 개회식. 전국에서 모여든 기자 500여 명이 언론 자유를 외쳤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조선 통치 방식을 전환하고 1920년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 창간을 허용했다. 그러나 정간과 신문 압수를 비롯한 유무형의 언론 탄압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언론인들은 사상 최초로 전국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조선기자대회를 계획했다. 대회는 1925년 4월 15일 서울 경운동 88번지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개회식을 시작으로 3일간 열렸다. 20여 개 신문과 잡지사가 참여했고 기자 500여 명이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4월 15일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칠하자”고 대회의 방향을 제시했다.

첫날 오전 개회식 후 저녁에는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문강연회가 열렸다. 이튿날에는 천도교기념관에서 기자대회가 계속됐고, 마지막 날에는 동대문 상충원에서 회원 간친회가 열렸다. “성대한 개회식을 마치고 저녁에는 다시 8시부터 종로청년회관 안에서 신문강연이 열렸는데 그 역시 대성을 이뤄 상하층 장내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 시대일보의 김정진 씨와 본사의 최원순 씨가 단에 올라 언론기관의 중대한 사명에 대해 얘기했다.”(4월 17일 동아일보)

조선기자대회에 이어서는 20일 민중운동대회가 예정돼 있었지만 대회 관계자들의 동태를 주시하던 일경은 민중운동대회의 개최를 금지했다. 이 대회 이후 각지에서 이어진 기자대회에 대해서도 일제는 감시와 탄압을 그치지 않았다. 1927년 12월 29일 동아일보는 함경남도 고원에서 열린 함남기자대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경찰이 (대회를) 금지하자 동 대회에서는 질문 위원을 뽑아 이유를 질문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상부 명령이라고 했다. … ‘함남기자대회 고원경찰탄핵대회 대강연회’라고 대서특서한 깃발을 선두로 하고 시내를 일주하면서 시위운동을 해서 거리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경찰은 닥치는 대로 검속했다. … 군중의 반항은 극도에 달해 200여 명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습격코자해 경찰은 총을 쏘며 해산시키려했다.”

광복 이후에도 언론의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를 통해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는 행위의 보도를 금지했다. 일부 언론사들이 반발했고 동아일보는 ‘백지 광고 탄압’을 당했다. 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동아방송을 비롯한 64개 언론사를 강제 통폐합해 18개로 줄였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언론 통폐합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피해자들의 피해구제를 권고했다. 이 결정이 실질적인 정부 조치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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