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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 꺾기 위해
엉뚱한 혐의 씌워
동아일보 폐간 압력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뒤 사원들이 동아일보 사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본보는 자못 돌연한 것 같으나 금 8월10일로써 소여의 보도 사명에 바쳐오던 그 생애를 마치게 되었으니 오늘의 본지 제6819호는 만천하(滿天下) 제독자위(諸讀者位)에게 보내는 마지막 지면이다.…그러나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1940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폐간사》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과 추축국 동맹을 맺은 일제는 한반도에도 전시 동원 체제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킨 데 이어 우리말과 문화의 최후의 보루였던 민족 언론의 폐간 공작에 나섰다.

 
총독부는 1939년 말 ‘언문신문통제안’이란 극비문서를 작성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한글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개만 남긴다는 계획이었다. 총독부는 두 회사의 인쇄시설, 광고 영업망 인수계획 등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5가지 시나리오까지 상정했다.

일제가 폐간 사유로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을 내세웠으나 실제 이유는 민족혼의 탄압이었다. ‘언문신문통제안’에는 동아일보에 대해 “학병이나 전쟁 관련 기사와 같은 ‘시국 관련 및 시정방침’에 관한 보도에 있어서 적극적 협력적 태도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주 교묘한 필치로 독자의 민족의식 계급의식을 부추기고 있다”며 “존재 자체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부추겨 문화공작의 지도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폐간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동양문화연구소가 펴낸 책 ‘조선총독부 고관들의 육성증언’도 일제가 얼마나 동아일보를 눈엣가시로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송진우가 경영하는 신문(동아일보)이 너무도 비아냥투성이여서 일반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미하시 고이치로 총독부 경무국장) “반전적(反戰的)이거나 반제적(反帝的)인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정말 싫고 귀찮은 대상이었다.”(후루카와 겐슈 총독부 보안과장)

총독부는 일본의 건국 기념일인 2월 11일을 기해 자진 폐간하라고 강요했다. 동아일보가 6개월을 버티자 총독부는 ‘동아일보 경리업무에 부정행위가 있다’며 사건을 조작해 간부들을 체포하고 10여 일간 구금 협박했다. 그래도 안 통하자 일경은 “동아일보가 800여 지국과 분국을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고 간부들이 인촌 김성수의 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했다”며 사장 백관수를 구속했다. 결국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열린 동아일보 중역회의에서 일경은 폐간계 제출을 거부하는 백 사장을 대신해 발행인을 임정엽 상무 명의로 바꾼 뒤 강제로 폐간신고를 받아냈다.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는 지령 6819호를 끝으로 폐간했다. 조선일보도 이날 폐간됐다. 이날 동아일보 지면에는 폐간사와 함께 탐스럽게 열린 포도송이가 얽혀 있는 고별사진이 실렸다. ‘다시 만나 포도송이처럼 뭉칠 날이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폐간 5년 4개월 만인 1945년 12월 1일 복간했다. 올해 4월 1일에는 창간 90주년을 맞는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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