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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민족혼의 그릇’ 깨려
조선어수업도 일본어로
1943년 끝내 과목 없애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만어(많어). 그런데 우리 집에도 하나 잇다.” “다레(誰)?” “너이지 누구야.” “도-시데(엇재서)?” “생각을 해보려무나. 精神(정신)이 잇서야 생각도 잇지.” “와다시(나)가 정신이 업서?”

“너 참 日本(일본)말 잘 하는고나. 그러나 그것이 精神업는 것이다. 네 눈에는 집안사람이 다 日本사람으로 보이느냐. 日本말은 日本사람에게 하고 朝鮮사람에게는 네 말로 하여라.”


―동아일보 1920년 6월 15일자 ‘조선어는 조선말로’ 기사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수난동지회 회원들의 기념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는 1910년 강제병합 이후 4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을 통해 단계적으로 조선어 말살에 나섰다. 1911년 1차 교육령은 맨 먼저 조선어의 모국어 지위를 박탈했다. 각급 학교에서 국어과목은 일본어가 차지했고 우리말은 ‘조선어 및 한문’이란 이름의 셋방살이 과목의 설움을 겪게 됐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조선어 및 한문’ 시간은 일본어 시간에 비해 절반이나 3분의 1밖에 안됐다. 초등교육에서도 조선어 과목을 제외한 모든 교육 용어로 일본어가 강요됐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이런 강압적 조선어 퇴출 공세를 크게 후퇴시켰다. 1920년 우리말 신문인 동아와 조선의 창간을 허용한 게 대표적 사례였다. 동아일보는 창간호를 내고 열흘 만인 1920년 4월 11일부터 13일까지 사흘에 걸쳐 ‘조선인의 교육 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는 1면 사설을 게재했다. 교육효과에 초점을 맞춘 이 사설의 이면을 읽을 수 있는 기사가 1920년 6월 15일 ‘조선어는 조선말로’란 기사다. 대화체 문답형식으로 시종일관한 기사는 조선어 교육시간에서조차 일본어로 강습하고 가정에서도 일본어로 대화하는 풍속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잠시 숨을 죽이던 일제의 조선어말살 책동이 다시 본색을 드러낸 것은 1934년 동아와 조선의 한글보급운동인 브나로드운동을 중단시키면서부터였다. 그 2단계 조치가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어 및 한문’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전락시키고 1년 뒤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수업을 사실상 폐지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1937년 11월 10일 ‘다시 학제개혁에 관하여’라는 사설을 통해 “조선어과의 폐지 운운은 이미 논급한 일이 있는 바 같이 조선의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 불가함은 재언을 요치 않는다”고 이에 반발했다. 조선어말살 책동의 3단계는 바로 그렇게 저항하는 동아와 조선의 폐간(1940년 8월)이었고 조선어학회 핵심인사를 탄압, 구속한 조선어학회사건(1942년 10월)은 그 완결이었다.

1943년 4월 공포된 4차 조선교육령에서 조선어과목이 삭제된 것은 그 완결의 공식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43년 당시 조선인의 일본어보급률(22%)은 대만의 일본어보급률(62%)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슬픈 모국어’를 저항의 반석으로 승화시킨 선조를 생각한다면 “영어를 가르치시겠습니까. 언어를 가르치시겠습니까”라며 어린이들의 사고방식까지 영어화하려는 행태는 자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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