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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56> 전당포

Posted by 신이 On 2월 - 22 - 2010

《“구월구일도 지나가고 이제는 완전한 깁흔 가을이다. 여름동안에는 낫잠만 자든 뎐당포에 활긔가 돌게 된 모양인대 그 원인으로 말하면 해마다 전례와 같이 날이 차지닛가 자연히 여름에 잡히엇든 겨울사리를 차저가는(찾아가는) 동시에 얼마동안 입지 아니하게 된 여름사리를 다시 잡히게 된 것이 큰 원인이라 하는데….”―동아일보 1921년 10월 11일자》

결혼반지서 헌옷까지
급전 돌리던 서민은행
습격사건도 단골뉴스



1930년대 서울의 한 민간 전당포.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물건을 잡고 돈을 꿔주는 전당포는 일제강점기 ‘질옥(質屋)’으로 불렸다. 1920년대 이후 전당포는 여인숙 하숙집 기생집과 함께 나날이 번성했다. 경성 시내에서 전당포업을 하는 사람은 1926년 1년간 조선인 133명, 일본인 102명을 합쳐 235명. 대출금액은 310만2330원 규모였다.

민간이 운영하는 전당포가 많아지면서 보통 월 3부나 4부를 넘지 못하던 이자가 곳에 따라 7부까지 뛰었다. 그러자 총독부가 감독하는 공셜뎐당포(공설질옥)가 설치됐다. 대출금액은 10∼20원으로 한정했다. “우선 경성부터 착수하야 각 주요 디에 공설질옥을 설치하야 리자도 보통 뎐당국보다 반액의 헐한 갑으로 하고 류질긔한(流質期限)도 삼개월내지 사개월을 륙개월로 하야 될 수 잇는 대로 일반빈민의 리익을 꾀하리라는데….”(1927년 7월 19일 동아일보)

 
당시 전당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서민 금융기관이었고 조선인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당포가 전례 없이 북적이면 한 해 농사가 흉년이거나 경제난이 심하다는 방증이었다. 서민들이 맡기는 주요 물품은 대부분 생활용품, 혼수품 등 귀중품이었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낡은 의복도 넘쳐났다. 1929년 2월 27일자에는 비참한 한재(旱災)에 바빠진 안성의 전당포 소식을 전했다. “농가에서 자녀의 혼인할 때에 간신히 만들어온 비단 의복도 있으나 대부분은 남루한 의복을 전당잡히는 것이 만코 그 박게 삼사십전 내지는 육칠십전 가치 박게 되지 않은 의복을 가지고 가서 뎐당을 잡히려다 가치가 넘우 적다하야 거절을 당하는 사람이 매일 칠팔명 내지 십여 명에 달한다.”

각종 귀중품이 오가는 전당포는 절도 도난사건의 온상이기도 했다. 절도범을 잡기 위해 경찰이 먼저 찾는 곳도 으레 전당포 주변이었다. 전당포 지붕을 뚫고 금품을 훔친 사건, 학생복을 입고 전당포를 침입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1934년 ‘안국동 전당포 습격사건’ 등은 신문의 단골 뉴스였다.

광복 후에도 전당포는 곤궁한 서민들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지만 1990년대 국민소득 증가로 전당포 이용률이 급감했고 ‘전당포영업법’이 1999년 3월 폐지되면서 전당포는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었다. 한편으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나 대부업체를 통해 쉽게 누구나 급전을 빌릴 수 있게 됐다. 2000년 초반 웹사이트를 통해 자동차, 노트북PC 등을 저당잡고 현금을 대출해주는 ‘사이버 전당포’가 적발되더니 2003년에는 명품 의류나 시계를 취급하는 ‘폰뱅크(pawn bank)’가 소개되기도 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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