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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48>전화

Posted by 신이 On 2월 - 22 - 2010

봉분에 수화기 대고
순종 “아이고 아이고”
전화로 3년喪치러

《경성부내의 삼월 말 현재의 뎐화 가입자 수는 일본인이 4875, 조선인이 951, 외국인이 143, 총계가 5969라 한다. 조선인의 서울인가 일본인의 서울인가. 문명의 이긔인 뎐화로 보아도 통곡하지 아니할 수가 업다. (중략) 우리는 조선의 오늘날 문명의 주인이 아니고 종이다. 우리는 이 문명의 주인이 되도록 전력을 다하자.
―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자》



 1937년경 전화를 거는 여성. 1935년 자동식 전화가 일부 보급됐으나 교환식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리나라에 처음 전화가 보급된 것은 1896년 10월. 덕수궁에 100회선의 전화 교환기를 설치하고 궁중에 3대, 각부에 7대, 평양과 인천에 2대 등 모두 12대의 전화기를 놓았다. 순종은 전화로 3년상을 치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3년 동안 아침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안장된 홍릉에 전화를 걸어 능지기가 수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애끓는 곡성을 전했다.

전화는 1920년 이후 전화기 보급이 보편화하면서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1921년 연간 7000만 건이던 통화는 1926년 1억2300여만 건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전화 급증에 따라 전화 교환수가 여성의 인기 직업으로 떠올랐다. 1920년 4월 12일 동아일보에는 경성전화국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 여성 3명이 근무하며 일어 능통자로 하루 8시간 일하면 월급을 25원 받을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여성에겐 고임금이었다. 그러나 전화기는 고가의 물품이었다. 1920년대 초 전화 한 대 값은 1700∼1800원으로 전화 교환수 월급을 6년 가까이 모아야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전화국에 전화를 신청한 뒤 추첨에 뽑혀야만 전화를 가질 수 있었다.

전화가 범죄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관청이나 은행 중역을 노린 전문털이단은 중역이 출근하면 집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 하인인데 양복을 가져오라고 한다”고 하고 양복을 받아 달아났다.(동아일보 1926년 2월 12일) 아편 밀매꾼들이 전화로 값을 흥정하던 중 전화가 혼선을 빚어 이를 들은 사람의 신고로 체포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21년 8월 6일)

전신 전화선은 독립군의 주요 타격 대상이기도 했다. 함경남도에서 활약하던 독립단은 삼수군 영성 주재소 근처 전신주 30개를 쓰러뜨린 뒤 주재소를 습격했다. 지원 병력 요청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주재소 순사와 독립단 간에 1000여 발의 총알을 주고받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1922년 9월 29일 동아일보는 전했다.

전화는 경제력과 정보력의 상징이었던 만큼 일본인과 한국인의 전화 보유 대수는 큰 차이를 보였고 이런 현실이 자주 기사화됐다. 1927년 통계를 보면 일본인은 16명당 1대, 조선인은 5000명당 1대꼴로 전화를 갖고 있었다.

2009년 10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유선전화 가입자는 2039만 명, 무선전화는 4775만 명에 달한다. 전화를 추첨해서 받고, 일본인보다 전화를 못 가진 것을 한탄했던 시기가 언제였던가 싶게 이제는 국민 1인당 1대씩 무선전화를 가진 정보화 강국으로 발전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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