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해외서적 반입 막자
러-만주 통해 사상 유입
독립운동 실천 무기로
1921년 국내 언론에 소개된 레닌의 초상화.
《“레닌은 엇더한 사람인가. 호한(好漢)인가 위인(偉人)인가. 아니라 악한인가 걸물인가. 레닌은 현(現) 노서아(露西亞) 소비에트 정부의 수석(首席)이오 과격파의 두령이라. 그 사상은 막쓰(Karl Marx)의 계통을 승(承)하야 막쓰보다도 과격하며 그 정치는 전제정치를 파괴하야 그 우에 다시 독재정치를 시행하나니….”―동아일보 1921년 6월 3일 1면,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 시리즈 1회》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갖가지 사상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됐다. 3·1운동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실천적 이념 무기로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상운동의 국내 유입 경로는 크게 두 갈래였다. 첫째는 러시아와 만주였다. 이동휘는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처음으로 한인사회당을 건설했으며 남만춘도 이르쿠츠크에서 공산당 한국지부를 결성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유학생들도 귀국 후 사상운동단체 결성에 나섰다.
서대숙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일제가 해외간행물의 한반도 내 반입을 봉쇄했기 때문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일간신문과 개벽 조선지광 신천지 등 잡지가 한국에 사상운동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1920년대 초기 사회주의 연구단체였던 신사상연구회를 개칭한 화요회, 일본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단체였던 북성회의 국내 본부격인 북풍회, 서울에서 창립된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 등에 소속된 인사들은 언론계에서도 활약했다.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도 1924년 동아일보에서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로 활동했다.
유재천 상지대 총장의 저서 ‘한국언론과 공산주의’에 따르면 1920∼1932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공산주의 관계 기사는 450건에 이른다. 연평균 35건씩 게재된 셈이다. 동아일보에는 154건, 조선일보에는 두 배가량인 296건이 게재됐다.
동아일보에는 1921년 1면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제목의 레닌 전기가 61회에 걸쳐 실렸고 1922년에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37회 연재됐다. ‘장래 조선민족의 순응할 바 대세를 고찰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진수와 정신을 참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1923년에는 서구의 다양한 ‘사회주의 비판론’도 연재됐다.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비판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보도는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독립운동의 이념적 방편을 찾기 위해 펼친 사상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에 관련돼 7년간 옥고를 치른 김준연은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 일본과 대차적 관계에 있는 소련과 악수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라고 청년들은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 격심해진 좌우 이념 분화는 6·25전쟁과 분단을 낳았다. 1922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를 내다보듯 “과격한 사회주의는 왕왕 계급증오와 동족분열의 우려가 없지 않다”며 “적어도 동족상애와 인도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가 아니면 허무 참담한 흑막을 연출할 것도 예상되는 바”라는 경계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서대숙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일제가 해외간행물의 한반도 내 반입을 봉쇄했기 때문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일간신문과 개벽 조선지광 신천지 등 잡지가 한국에 사상운동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고 밝혔다.
1920년대 초기 사회주의 연구단체였던 신사상연구회를 개칭한 화요회, 일본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단체였던 북성회의 국내 본부격인 북풍회, 서울에서 창립된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 등에 소속된 인사들은 언론계에서도 활약했다.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도 1924년 동아일보에서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로 활동했다.
유재천 상지대 총장의 저서 ‘한국언론과 공산주의’에 따르면 1920∼1932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공산주의 관계 기사는 450건에 이른다. 연평균 35건씩 게재된 셈이다. 동아일보에는 154건, 조선일보에는 두 배가량인 296건이 게재됐다.
동아일보에는 1921년 1면에 ‘니콜라이 레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제목의 레닌 전기가 61회에 걸쳐 실렸고 1922년에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37회 연재됐다. ‘장래 조선민족의 순응할 바 대세를 고찰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진수와 정신을 참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1923년에는 서구의 다양한 ‘사회주의 비판론’도 연재됐다.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비판하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높이 평가했다.
이 같은 보도는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독립운동의 이념적 방편을 찾기 위해 펼친 사상 논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에 관련돼 7년간 옥고를 치른 김준연은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 일본과 대차적 관계에 있는 소련과 악수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라고 청년들은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 격심해진 좌우 이념 분화는 6·25전쟁과 분단을 낳았다. 1922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를 내다보듯 “과격한 사회주의는 왕왕 계급증오와 동족분열의 우려가 없지 않다”며 “적어도 동족상애와 인도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가 아니면 허무 참담한 흑막을 연출할 것도 예상되는 바”라는 경계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