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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 ‘사의 찬미’ 히트
국악중심 음반시장 흔들
신문서 유행가 공모도


1935년 잡지 ‘삼천리’가 1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광고. 총 1만130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사진 제공 민음인

 
 
《“무엇보다 유행가 가사가 먼저 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따라서 부르는 사람 자신이 이 시를 참으로 이해하여 그 말의 억양과 고저, 강약이 분명하게 대중의 귀와 가슴을 울리도록 힘써야 할지니 실로 유행가는 그 우열의 구별이 여기서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34년 4월 2일자》

19세기 말 ‘유성기’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음악의 대중화가 촉진되기 시작했다. 유성기 음반인 레코드도 인기를 얻었다. 판소리 단가 잡가 등 국악을 비롯해 트로트 신민요 만요(만담을 소재로 한 노래)를 일컫는 대중가요가 레코드로 제작됐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레코드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이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1930년대에 본격적 가요의 시대가 열렸다. 1932년 7월 2일 동아일보에는 ‘조선에 들어오기는 24년 전, 제일 많이 팔린 것은 윤심덕의 사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축음기 유입과 인기 음반의 판매 현황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서 현재 레코드계에서 가장 큰 감안이 되어 있는 것은 ‘신아리랑’ ‘에로를 찾는 무리’와 가튼 류행가로 이름을 날리고 잇는 이애리수, 강석연, 김선초 세 사람의 것입니다. … 조선사람의 것으로 제일 만히 나가본 것이 (윤심덕) 양의 ‘사의 찬미’로 1만 2천여장 이엇답니다. … 조선 외에 만주, 간도, 하와이 가튼 데로도 1년에 오백장씩은 나갑니다.”

이 시기에는 ‘황성(荒城)의 적(跡)’처럼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애조 띤 노래들이 큰 인기를 누렸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익살스러운 만요나 향락적 재즈송도 활황을 구가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유쾌한 시골 영감’(강홍식·1936년) ‘오빠는 풍각쟁이’(박향림·1938년) 등이 이 시기에 처음 발매된 곡들이다. 재즈 공연도 열렸다. 백명곤을 중심으로 홍난파, 박언원 등이 모여 만든 ‘코리안 재즈 밴드’는 1928년 서울, 광주 등지에서 공연하며 호응을 얻었다. 1928년 12월 21일 동아일보에도 ‘코리앤 째스뺀드의 가장음악회’ 공연을 알리는 안내 기사가 실렸다.

대중에게 미치는 유행가의 영향력이 커지자 신문사 등이 유행가 현상공모,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유행가 비판과 정화운동을 펼쳤다. 동아일보에는 ‘유행가요의 제작문제’ 기사가 3회에 걸쳐 실리거나(1934년 4월 2일) 사설 ‘레코-드와 류행가요 그 정화를 기하자’(1934년 4월 23일) 등 음반회사의 상업성, 유행가의 비속성을 비판하는 기사와 논설이 자주 실렸다.

한국의 대중가요는 1940년대부터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에 직간접으로 부응하는 군국가요가 등장하면서 광복 전까지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류 바람을 타고 보아, 동방신기 등이 일본, 중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원더걸스의 ‘노바디(Nobody)’가 한국 가수의 곡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메인 차트 100위에 진입하기도 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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