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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47>기차와 철도역

Posted by 신이 On 2월 - 22 - 2010

검은 연기 뿜는 도깨비’
한반도 수탈위해 도입
유럽풍 경성역 명소로


일제강점기 때의 경성역(서울역) 앞. 동아일보 자료 사진

 
 
《“2층 양옥 경성뎡거댱도 머지안아 손님을 마주고 보내게 된담니다…이 집 구조의 내용은 가보시면 아시려니와 내부에는 승강기와 난방장치도 잇고…2층에는 리발실과 크고 적은 식당이 잇다는데 200여 명분의 연회설비도 할만 하담니다. 그 중에도 우스운 것은 중계(中階)에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잇는 변소를 만들어 두엇담니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8일자》

1899년 9월 18일 증기기관차가 토해내는 굉음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서울 노량진에서 제물포(인천의 옛 이름)까지 32.3km를 오가는 경인선 열차가 첫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철도는 개화와 문명의 상징이자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기차를 괴물, 도깨비로 불렀다. 철로와 정거장 주변에는 언제나 기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후 일제는 철도 건설을 가속화했다.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호남선, 1914년 경원선, 1928년 충북선, 1931년 장항선, 1936년 전라선, 1939년 경춘선, 1942년 중앙선 개통 등 한반도 곳곳엔 철도가 들어섰다.

일제가 철도 건설에 열을 올린 것은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과 러시아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한반도의 식량자원과 광산자원을 약탈해 실어 나르기 위한 의도였다. 일제의 의도가 이렇다 보니 철도를 이용하는 데에 한국인 차별이 빈번했다. 동아일보는 1923년 3월 6일자 사설에서 ‘다소의 편리를 이용하여 조선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주머니를 빼앗아가는 교통기관’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사정은 서울시내의 전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사람에게는 불공하기 짝이 없고 이따금 가증하고 밉살스러운 차장들은 뎡류댱 이름을 일본말로만 하고 조선말로는 아니 함니다.’(동아일보 1926년 3월 6일자)

일제강점기 철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1925년 9월 30일 준공된 경성역사(서울역사)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중앙 건물엔 비잔틴풍의 돔을 얹었고 그 앞뒤 4곳에 작은 탑을 세웠다. 1층 창의 3분의 2 되는 곳까지는 석재로 마감하고 그 위와 2층은 연분홍 벽돌로 마감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냈다. 역사의 처마엔 지름 1m가 넘는 대형 시계를 걸었다.

유럽풍의 새로운 모습 덕분에 경성역은 당시부터 화제였다. 2층에 들어선 식당은 한국 최초의 양식당이었다. 이용객이 계속 늘었고 서울역은 여행의 중심 공간으로 떠올랐다. 동아일보 1933년 7월 11일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역 구내에 공중목욕탕이 들어선다는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경성역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경성역 대합실에서 느낀 것은 낭만보다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고독과 슬픔이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공간 서울역. 2004년 KTX 개통으로 역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했고 지금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공사가 끝나는 2011년 2월, 옛 서울역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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