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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40> 수학여행

Posted by 신이 On 2월 - 21 - 2010

‘금강산 원족’ 최고 인기 1930년대 일본행 늘자 “돈많이 든다” 반대여론

《“원족(遠足)간다 하야 모양을 내기 위하야 의복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잘못임니다. 간단하게 하는 동시에 더러워질 생각을 하고 검소하게 차리는 것이 좃슴니다. … 듯고 보는 것을 일일히 긔입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함니다. 조선 학생들을 보면 원족을 오즉 유흥 긔분으로써만 하야 지식함양이라는 y은 조곰도 도라보지 아니하고 잇슴니다. 이y을 속히 교정하여야합니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4일자》



1936년 6월 경성으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광화문의 동아일보 본사를 견학한 황해도 수산안성광 보통학교 학생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학생들이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소풍(원족)이나 수학여행을 가게 된 것은 근대적 교육이 도입된 1900년대 초. 1920년대엔 각 학교의 수학여행 소식도 일일이 신문에 전해졌다. “시내 진명녀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삼학년생 사십오 명이 십칠일 오후 열한시 차로 안동현에, 사학년생 삼십이 명은 십팔일 오전 여덜 시 오십분 차로 금강산에 각각 수학려행을 떠난다더라.”(1928년 10월 19일자 동아일보) 여기서 보듯 고등보통학교 상급생의 최고 인기 코스는 금강산이었다. 소학교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유적지를 주로 택했다.
 

새로운 경험에 마음이 들뜨기는 예전과 지금이 다름없지만 안전사고 방지가 큰 문제였다. 기차에서 추락해 학생들이 사망하거나 다리가 무너지는 참사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1931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에는 ‘잔교(棧橋) 붕락(崩落)으로 생도 5명 익사’라는 수학여행 사고 기사가 보도됐다. ‘장야현 소학교생도 6년생 남녀 150명은 18일 오후 2시 3명에게 인솔되야 그중 30명은 잔교 위에서 휴식하다가 다리가 문허지어 전부 물에 빠지었다. 극력 구조한 결과 대개는 구조 되얏스나 그중 녀생도 5명은 사망하얏다.’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점차 큰 비용을 들이게 되면서 수학여행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도 빚어졌다. 1926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수학여행의 가부(可否), 교육자 제씨에게’라는 글이 실렸다. “경성 모 고등학교 교장의 말을 듯건대 그 학교에서만 사천여원의 차비를 지불하엿다 하며 글세 이러케 거비(巨費)를 써서라도 수학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한탄 하였다. … 이러한 거금을 지불하여서까지 수학여행을 할 필요가 잇슬까.”

1930년대 들어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학교가 많아졌다. 한 독자는 1931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이러한 현상을 비판했다. “근래 각 학교에서는 일본 등지의 대도로 수학여행 가는 것이 경쟁적으로 대유행이 되는 모양이다. 이전에는 금강산이나 경주 등지로 많이 가더니 근래에는 일본행이 단연 수위를 점하고 있다. 어떠한 방침하에서 생긴 일인지? 과연 묵인할 만한 것인지?”

광복 후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학생들의 야외 활동은 수학여행 외에도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됐다. 현장 체험학습도 그 하나다. 도농 간 교환학습이 허용된 1997년 한 해 동안 서울 초등학생 2876명이 농촌으로 체험학습을 떠났다. 2005년 주5일 수업이 도입된 뒤엔 갯벌 탐사를 비롯해 별자리 관찰, 해병대 체험, 인도 1개월 배낭학교, 귀족체험 등 체험학습의 종류도 한층 다양해졌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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