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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체육 장려위해” 반대여론 딛고 강행 남녀 기회균등 상징

흰색 유니폼을 입은 1923년의 경성여고 정구 선수들.

 

《“남자의 체육을 위하야 적은 힘이나마 아끼지 안튼 동아일보에서는 다시 한거름 나아가 미래의 조선의 어머니가 될 여자의 체육을 위하야 장려하는 한 방침으로 우선 금년부터 조선녀자정구대회(朝鮮女子庭球大會)를 주최키로 하얏다.”―동아일보 1923년 6월 22일자》
1923년 6월 30일 서울의 경성제1여고(현 경기여고) 운동장에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두 여자들뿐, 남성들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학교 담장 위로 촘촘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나무에도 매달려 있었다. 나뭇가지가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면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비명과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제1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가 열린 날. 당시만 해도 남녀가 유별하고 여자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라 다 큰 여학생들이 라켓을 들고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코트를 누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대회 불가(不可)’ 여론이 워낙 거세자 주최 측은 ‘남성의 입장을 불허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제야 겨우 대회를 열 수 있었다. 대회에 몰린 관중은 무려 3만 명이었다. 당시 경성 인구가 25만 명이었으니 대성황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7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학교 운동장의 담벼락이 무너지고 배추밭이 잘못되기도 했다’는 당시 상황이 실렸다.


“이번 대회를 공개치 못한 것은 일반에게 죄송 미안한 일이나 이왕 부인만 허락한다는 대회장에 흰 구두는 물론이오 누런 외투까지 입은 양반이 부인 입장권을 가지고 부득 떼를 쓰는 것은 신사의 체면에 못할 일이 아닐른지….”

정구(soft tennis)는 1883년 일본에서 테니스 용품을 구하기 어려워 고무공과 가벼운 라켓으로 경기한 데서 유래한 종목이다. 동아일보는 1921년 첫 전조선정구대회를 주최했고 이 대회의 인기가 높아지자 1923년 여자 정구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유교적 전통이 굳어져 있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개최한 사회적 캠페인이기도 했다. 1923년 6월 30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이 대회를 통해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고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모성의 권위를 역창(力唱)하야 남자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과 직업의 기회균등을 주장하야 전 세계의 유발(有髮) 남자와 당당히 맞서는 일반 부인운동의 대세는 물론이라.…조선 장래의 신여성계에 중대한 임무를 갖고 있는 일반 여학생들이 모든 방면의 활동기초가 될 체육의 수양에 심각한 유의를 촉(促)하노라.”

이 대회의 전통을 계승한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는 올해 87회가 열렸다. 국내 전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최장수 대회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정구에 걸린 금메달 7개를 모두 획득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남녀 혼합 복식조와 여자단체가 금메달을 따냈다. 정구 종목에서 한국은 세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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