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號外)의 호외(號外) 발행-식산은행(殖銀)과 동양척식회사(東拓)에 폭탄을 던지고 다시 권총으로 일곱 명을 살상한 후 자살까지 한 라석주(羅錫疇) 사건에 대하야 작일 호외를 발행하엿스나 여러 차례나 당국의 삭제를 당하고 다시 호외를 발행하야 시내에 배포하엿스며 지방에는 금일 본지와 함께 배송하엿삽.’ ― 동아일보 1927년 1월 14일자 2면 사고(社告)》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명 동척(東拓)이라고 불린 이 회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해 190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든 국책회사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 각지의 토지를 빼앗아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된 이 회사는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뜯어내는 경제수탈에 앞장섰다. 1922년 황해도 재령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소작쟁의가 잇따랐다. 삶의 기반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잇따라 만주로 연해주로 향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명 동척(東拓)이라고 불린 이 회사는 일제가 한반도를 수탈하기 위해 1908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든 국책회사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 각지의 토지를 빼앗아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된 이 회사는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뜯어내는 경제수탈에 앞장섰다. 1922년 황해도 재령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소작쟁의가 잇따랐다. 삶의 기반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잇따라 만주로 연해주로 향했다.
오늘날 서울 중구 을지로2가 외환은행 자리에 있던 동척에서 폭음이 울린 것은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현재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조선식산은행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33세의 의열단 단원이었던 나석주 의사(사진)는 거사를 결행한 뒤 권총으로 일경 등 일본인 7명을 살상하고 장렬히 자결했다.
백주에 경성시내 한복판에서 폭탄 투척과 총격이라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했다. 일본의 각 신문과 방송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조선에서는 보름이 넘도록 보도가 통제됐다. 17일 만인 1927년 1월 13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자 곧바로 동아일보 호외가 나왔다. ‘백주 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나 의사의 의거를 전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호외를 곧바로 압수했다. 당국이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 실렸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가 취재해 실은 나 의사의 유족 일람표, 가족 기사, 필적 사진을 문제 삼았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월 14일 두 번째 호외를 발행했다. 같은 날 본지 1면에는 ‘경무국의 당황’이라는 사설과 2면 ‘호외의 호외 발행’이란 제목의 사고에서 총독부의 집요하고 악랄한 언론통제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번 동척폭탄사건 기사에 대하야 경무국은 분반(噴飯·입안의 밥이 튀어나옴)할 당황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각 신문은 물론이오 무전방송으로 사건의 진상이 상세히 보도된 지 반삭(半朔)이나 되여서 겨오 해금한다는 것이 첫째 당황이오 (…)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 이러케 몰도리(沒道理)한 처치가 잇스리라고는 밋지 못하엿다.”
이 사설은 일제가 편집국과 공무국에 경찰을 배치해 기사를 삭제하고 배달을 못하게 하는 만행을 고발하며 “‘인쇄는 하더라도 허락 없이는 배달 못 한다’하는 명령은 경무당국이 법률로 허락된 권리까지도 초개(草芥)처럼 여기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조선 민중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올 독립운동 보도를 막으려 한 일제와 이에 맞선 신문의 투쟁을 보여준 근대사의 한 장면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백주에 경성시내 한복판에서 폭탄 투척과 총격이라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했다. 일본의 각 신문과 방송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조선에서는 보름이 넘도록 보도가 통제됐다. 17일 만인 1927년 1월 13일 보도금지가 해제되자 곧바로 동아일보 호외가 나왔다. ‘백주 돌발한 근래 초유의 대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나 의사의 의거를 전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호외를 곧바로 압수했다. 당국이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 실렸다는 이유였다. 동아일보가 취재해 실은 나 의사의 유족 일람표, 가족 기사, 필적 사진을 문제 삼았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월 14일 두 번째 호외를 발행했다. 같은 날 본지 1면에는 ‘경무국의 당황’이라는 사설과 2면 ‘호외의 호외 발행’이란 제목의 사고에서 총독부의 집요하고 악랄한 언론통제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번 동척폭탄사건 기사에 대하야 경무국은 분반(噴飯·입안의 밥이 튀어나옴)할 당황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각 신문은 물론이오 무전방송으로 사건의 진상이 상세히 보도된 지 반삭(半朔)이나 되여서 겨오 해금한다는 것이 첫째 당황이오 (…) 경무국이 기사 내용을 딕테이트(dictate)한다는 것은 경찰 만능의 조선에서도 초유의 사(事)엿다. 아모리 주책없는 경무당국이라도 이러케 몰도리(沒道理)한 처치가 잇스리라고는 밋지 못하엿다.”
이 사설은 일제가 편집국과 공무국에 경찰을 배치해 기사를 삭제하고 배달을 못하게 하는 만행을 고발하며 “‘인쇄는 하더라도 허락 없이는 배달 못 한다’하는 명령은 경무당국이 법률로 허락된 권리까지도 초개(草芥)처럼 여기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조선 민중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올 독립운동 보도를 막으려 한 일제와 이에 맞선 신문의 투쟁을 보여준 근대사의 한 장면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