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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 꺾으려는 日
광화문-석굴암등 훼손
중건운동 벌여 저항


일제가 철거하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한 1926년 광화문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광화문아! 너는 가라느냐 … 주야를 불분(不分)하고 너의 압뒤를 왕래하든 충신들이며 왕성(王城)을 직혀 피로써 최후를 맷든 무명소졸(小卒)들의 꼿다운 혼이며 종국(終局)의 운명을 보고 눈물을 쁘리며 너를 작별하든 지사들의 그림자를 너는 응당히 보앗스리로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3일자 수상(隨想) ‘잘 가거라 광화문아’》

일제 식민통치의 걸림돌은 경복궁이나 광화문의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등지고 앉고 광화문을 옆으로 밀어내도 민족의 숨결은 고스란히 남았다.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일제와 조상이 남긴 유서 깊은 건축물을 보존하려는 조선인의 투쟁은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됐다.
 
 
총독부는 형식적으로 고적(古蹟)보존회를 두었으나 대부분 사적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방치돼 퇴락하고 뜯겨 일본인에게 팔려나가기까지 했다.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본존불은 외부에 시멘트를 발라 생긴 습기 때문에 이끼가 끼어 이를 없앤다며 증기로 석불을 씻어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1926년 11월 13일 동아일보에는 일제 당국의 무성의를 질타하는 기사가 실렸다. “진정한 규모의 사적보존은 조선인 측으로, 자성자주(自醒自做·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짓는다)할 날이 오기만 기다린다.”

일본 학자들이 ‘낙랑 유적의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망언을 늘어놓자 이를 규탄하는 ‘낙랑의 발굴물, 국외 지거(持去)는 단단불가(斷斷不可)’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1925년 11월 25일)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치르던 융무당과 융문당이 일본 절을 짓기 위해 헐리게 되자 이를 고발한 기사도 1928년 8월 13일 실렸다.

기나긴 민족 역사에서 ‘잠시’ 조선을 강점한 일제를 이기겠다는 민족의식은 임진왜란을 맞아 왜군을 무찔렀던 민족 영웅들을 돌아보게 했다. 행주대첩에서 활약한 권율 도원수를 기리는 기공사(紀功祠)가 퇴락하자 경기 고양군 현지의 유지들은 1931년 여름 수축기금을 모았고 다음 해 여름 기공사는 제 모습을 찾았다. 경남 진주군의 창렬사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산화한 창의사 김천일과 절도사 최경회, 현감 황진 등의 신위를 둔 곳으로 300년의 풍상에 무너질 지경이었다. 중건 운동이 벌어지자 성금이 답지해 1935년 건물을 다시 짓고 새 강당까지 건립했다.

이 같은 노력 속에도 선조들의 정신이 서린 수많은 문화재가 일제의 손길에 자취 없이 사라졌다. 특히 도성의 한복판을 당당하게 지키던 광화문이 1926년 철거된 일은 조선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역사의 숨구멍도 갓든 광화문이 문득 우리 안전(眼前)에서 살아젓슴을 무관심하도록 우리의 신경이 둔하지를 못하고나. 어허 광화문은 헐렸다 아니 업서젓다. 육조(六曹) 앞을 데미다볼 때에 귀어운 우리 전통은 뿌리째 뽑혀젓슴을 본다.”(1927년 4월 14일 동아일보 사설)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된 광화문은 2006년 시작된 복원 공사에 따라 2010년 10월에 고종 2년(1864) 중건 때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선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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