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친서-밀사 파견
中쑨원-인도 타고르
“조선독립” 본보 기고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 그는 “독립 의지를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 1921년 8월 17일자》
1905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미국인 호머 헐버트를 통해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다. 이어 고종은 1907년 7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밀사로 파견해 세계 각국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며 국제 여론을 환기했다.
이 두 사건은 한일강제병합 이전 조선의 독립을 외국에 호소한 대표적인 사례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도 해외에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기관지 ‘독립신문’을 비롯해 ‘신대한보’ ‘신한청년보’ 등을 발행하면서 임정의 활동 소식을 국내외에 알렸다. 미국 워싱턴의 임정 구미위원부에서는 잡지 ‘한국 리뷰’를, 프랑스 파리의 파리한국통신부에서도 소식지를 발행해 홍보 활동을 전개했다.
임정은 1919년 4월 18일엔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보내 한국 독립승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 군축회의에서도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1년 11월 11일 동아일보 1면에는 ‘화성돈(華盛頓·워싱턴)회의에 기(奇)하노라’라는 제목으로 “워싱턴 태평양군축회의에서 조선 민족에게 독립과 자결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설이 실렸다. 이후에도 30여 회나 비슷한 논조의 사설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에 호응해 해외 각국에서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쑨원(孫文)은 1920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기고에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9년 4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기고한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이란 시가 게재됐다. 시에서 타고르는 조선 민중에게 “민족의 부활을 이룩하여 빛나는 동방의 문화국가를 이룩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 폴란드 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해 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실정을 해외에 알리는 게 이렇게 어려웠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상전벽해인 셈이다. 1960년대 이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국력을 신장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독도 영유권이나 세계 지도에서 동해 표기 문제는 여전히 한일 간의 갈등 요소다. 정부 차원의 홍보 외에도 민간 외교 사절로 불리는 반크(VANK)가 해외에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데 큰 활동을 하고 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임정은 1919년 4월 18일엔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보내 한국 독립승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 군축회의에서도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1921년 11월 11일 동아일보 1면에는 ‘화성돈(華盛頓·워싱턴)회의에 기(奇)하노라’라는 제목으로 “워싱턴 태평양군축회의에서 조선 민족에게 독립과 자결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설이 실렸다. 이후에도 30여 회나 비슷한 논조의 사설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에 호응해 해외 각국에서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쑨원(孫文)은 1920년 8월 11일 동아일보에 보낸 특별기고에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9년 4월 2일에는 동아일보에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기고한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이란 시가 게재됐다. 시에서 타고르는 조선 민중에게 “민족의 부활을 이룩하여 빛나는 동방의 문화국가를 이룩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1944년 프랑스 폴란드 소련 정부는 주중대사관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통고해 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실정을 해외에 알리는 게 이렇게 어려웠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상전벽해인 셈이다. 1960년대 이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탁월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국력을 신장한 덕분이다. 그럼에도 독도 영유권이나 세계 지도에서 동해 표기 문제는 여전히 한일 간의 갈등 요소다. 정부 차원의 홍보 외에도 민간 외교 사절로 불리는 반크(VANK)가 해외에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데 큰 활동을 하고 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