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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밧는 것을 슬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대하야 한 일이 너무 업슴이 도로혀 붓그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야 자나 깨나 잇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으나마 무슨 늣김을 줄 것 갓흐면 그 늣김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8일자》

 

부임 日총독에 폭탄
“조선청년 깨어나라”
백발 노인의 가르침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죽음마저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민족혼을 심는 교육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에서다. 강우규(姜宇奎·1855∼1920·사진)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서울역의 전신)에서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졌다.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 주인공이 백발노인임이 알려지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은 컸고 이후의 의열 투쟁에 불씨가 됐다.


 1920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 법정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들어서고 있는 강우규 의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강 의사가 재판 과정이나 수형 생활 중, 처형 직전 보인 당당한 모습은 그가 재판 과정도 운동의 연장선으로 삼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의거 보름 후 체포돼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1시간 동안 독립 연설을 했다. 연설 중 숨이 찼던 강 의사는 “물을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물을 마신 뒤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일본 경찰의 증언록에 나온 내용이다.

공판 과정 중에도 그는 당당한 기개로 소신을 피력했다. 동아일보에 그의 공판 소식이 처음 보도된 것은 1920년 4월 1일, 바로 창간호였다. 이어 사형이 확정된 5월 27일까지 14건의 기사에 공판 과정이 속속들이 전해졌다. 4월 16일에는 강 의사의 1심 최후법정진술이 실렸다. “사이토는 동양 평화를 깨뜨리는 사람이며 인도주의를 무시하는 사람이므로 죽이려 한 것이요. 검사의 말에 나를 매명한(賣名漢)이라고 하나 나는 죽어도 매명한이 아니오. 인도 정의와 동양평화와 조국을 위하여 한몸을 바친 자요.”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에 따르면 강 의사는 1859년(호적상의 태어난 해. 강 의사가 재판 도중 자신의 실제 나이는 호적보다 4살 많다고 밝힌 바 있음) 평안남도 덕천군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해 한약방을 운영하며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 전파에 힘을 쏟았다. 성재 이동휘 집안과 인연을 맺으면서 구국운동론에 감화돼 민족교육으로 독립운동 일꾼을 양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듬해인 1911년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건너간 뒤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오가며 박은식 계봉우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힘썼다.

그가 유언에서 조선 청년의 교육을 걱정한 것도 함경남도 홍원군 영덕리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것을 포함해 연해주와 만주 등에 6곳의 민족학교를 설립했던 경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1920년 5월 27일 상고 기각으로 강 의사의 사형은 확정됐다. 같은 해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는 66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내년이 강 의사 순국 90주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는 내년 의거일에 맞춰 서울역 옛 청사 앞 광장에 동상을 세울 예정이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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