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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질의 근원 파리 잡자”
콜레라 유행에 경각심
활명수-용각산 선보여

《“그동안 까닭 만튼 부산의 괴질검역은 민간에 말성 만튼 바이더니 오는 열흘날로부터 그 검역방법을 개정하야 실행한다 하는데 그 요y은 종태에는 부산에 입항하는 련락선은 먼저 항구밧 신선대에 머무르게 하고 승객의 대변검사를 한 뒤에 선창에 대이게 하야 하역케 하얏슴으로…” ―동아일보 1920년 8월 9일자》



 1921년 경성부가 주도한 ‘파리 박멸 운동’ 당시 제작된 전단. 사진 제공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신의술, 즉 서양 근대의학은 개항과 함께 국내에 활발하게 도입되기 시작했다. 1879년 지석영은 두 살 난 처남에게 종두법을 시술했다. 근대의학을 백성들의 건강증진을 통한 부국강병의 방편으로 여긴 고종은 1885년 제중원 설립을 명하고 근대의학 보급에 적극 나섰다.

근대의학은 공중보건과 위생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1919년과 1920년 조선에서는 콜레라가 유행해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전염병을 옮기는 파리에 대한 전국적인 소탕 운동이 벌어졌다. 1924년 5월 5일 동아일보는 “녀름 한철 우리의 죽음은 거의 반수 이상이나 괴질노 인한 줄을 알 때에 우리는 본능0으로라도 파리를 보고 잡지 안을 수가 업슬가 한다”며 파리 박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제는 전염병이 번지면 ‘위생경찰’을 투입해 방역과 환자 색출 작업을 실시했다. 일제 의료정책은 식민정책의 효율성에 중점을 두고 강제적으로 집행됐다. 1927년 3월 함경남도 영흥에서 폐디스토마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심장 중독성이 강한 에메틴을 주사하다 사망자 6명, 중태 6명, 활동 부자유자 93명이 발생한 사건은 이 같은 정책이 낳은 비극이었다. 동아일보는 1927년 3월 27일 ‘독침의 희생, 실신한 듯한 독자(獨子)의 가족’ 기사에서 3대 독자를 잃어버린 한 유가족의 슬픔을 전했다.

결핵도 1930년대 후반 환자가 약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위협적인 질병이었다. 결핵 치료에는 주로 선교병원이 나섰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셔우드 홀은 1928년 조선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세웠던 인물. 그는 1932년 7월 21∼25일 동아일보에 결핵치료법인 인공기흉요법을 소개하는 글을 5회 연재했다.

한의학과 서양근대의학을 결합한 소화제 활명수, 기침과 천식에 복용하는 용각산 등이 당시를 풍미했던 약이다. 1926년 유한양행, 1935년 금강제약소 등 근대적 제약기술을 갖춘 기업들도 생겨났다.

동아일보 1934년 1월 23일 ‘백년 뒤에는 의술이 얼마나 변할가?’ 기사는 미래 의학의 발전상을 전망했다. 암에 대해서는 “‘라지움’의 방사선을 쓰면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전혀 알 수 없을 만치 없어지는 것이나 다시 2, 3년 지나면 또 생깁니다”라며 백년 뒤에도 완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폐결핵에 대해서는 “폐병은 낫는다고 하드라도 폐의 호흡작용이 약하여져서 건강한 몸을 될 수가 없다”고 썼다. 그러나 암은 현재 대부분 50% 이상의 완치율을 보이고 폐결핵도 완치 가능한 병이 됐다. 130여 년 전 서양의 종두법에서 출발한 한국 근대의학은 이제 외국인이 한국에서 치료받는 ‘의학 수출 시대’를 열고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blog_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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