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상여길에 외친 “조선독립 만세”
어린 학생들의 의거
《재판장=피고(이병립 연희전문학교 학생)는 륙월 십일 국장일 관수교 우에서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럿는가.
피고=그럿소.
재판장=그것은 무삼 목덕으로 불럿는가.
피고=그럿소.
재판장=그것은 무삼 목덕으로 불럿는가.
피고=그것은 세살난 아해라도 다 알 일이니 무를 필요도 업는 줄 아오.(중략)
재판장=피고는 ○○○○을 희망하는가.
피고=네, 희망합니다.―동아일보 1926년 11월 3일자》
재판장=피고는 ○○○○을 희망하는가.
피고=네, 희망합니다.―동아일보 1926년 11월 3일자》
1926년 11월 2일 열린 6·10만세운동의 첫 공판. 서 있는 사람이 운동을 주도했던 이병립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반경. 순종의 대여(임금의 상여)가 서울 종로3가 단성사를 지날 무렵. 호각소리와 함께 중앙고보 5학년생인 이선호가 격문을 뿌리며 외쳤다. “조선독립 만세!”
이를 신호로 종로 관수교와 동대문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와 중동고보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다. 6·10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만세운동은 전북 순창 고창, 충남 홍성 공주, 평북 정주 등으로 확산됐다.
당시 이병립 등 연희전문 학생과 중앙 중동고보 학생 등은 순종의 인산일(출상일)에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한 뒤 이틀 전인 8일 서대문 밖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9일엔 1만여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6·10만세운동을 알린 6월 11일의 지령 2068호 동아일보는 ‘당국의 기휘(忌諱·금령)에 저촉된 바가 유(有)하야’ 발행금지를 당해 해당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로 재발행했다. 일제는 70여 명을 검거했으나 사태를 조기 진화하기 위해 수모자(首謀者) 11명만 기소하고 나머지는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그러나 일제는 20여일 뒤 검거됐던 학생에 대해 학교 측에 무기정학 이상의 징계를 내리도록 요구했고 학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7월 9일 동아일보에는 ‘학생 처벌에 대한 일반 공안(公眼)에 비친 얘기’라는 제목으로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은 “교활한 정책으로 참으로 혹독하다”고 했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관여했던 유진태는 “남은 것은 반감뿐”이라고 말했다.
그해 11월 2일 시작한 첫 공판은 3, 4일 이틀간 동아일보 지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심문 내용과 공판 분위기를 전한 기사는 일제가 ‘독립’이란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사건 이름을 ‘육십 조선○○만세’이라고 표기했다. 법정 진술 중 민감한 내용은 여지없이 삭제됐다.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1심에서 대부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2심에서 징역 1년으로 형량이 높아져 1927년 9월에야 풀려났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이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87년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동참한 6·10민주화운동도 이들의 행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이를 신호로 종로 관수교와 동대문 일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와 중동고보 학생들도 만세를 불렀다. 6·10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만세운동은 전북 순창 고창, 충남 홍성 공주, 평북 정주 등으로 확산됐다.
당시 이병립 등 연희전문 학생과 중앙 중동고보 학생 등은 순종의 인산일(출상일)에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한 뒤 이틀 전인 8일 서대문 밖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9일엔 1만여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6·10만세운동을 알린 6월 11일의 지령 2068호 동아일보는 ‘당국의 기휘(忌諱·금령)에 저촉된 바가 유(有)하야’ 발행금지를 당해 해당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로 재발행했다. 일제는 70여 명을 검거했으나 사태를 조기 진화하기 위해 수모자(首謀者) 11명만 기소하고 나머지는 기소유예로 석방했다.
그러나 일제는 20여일 뒤 검거됐던 학생에 대해 학교 측에 무기정학 이상의 징계를 내리도록 요구했고 학교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7월 9일 동아일보에는 ‘학생 처벌에 대한 일반 공안(公眼)에 비친 얘기’라는 제목으로 이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은 “교활한 정책으로 참으로 혹독하다”고 했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관여했던 유진태는 “남은 것은 반감뿐”이라고 말했다.
그해 11월 2일 시작한 첫 공판은 3, 4일 이틀간 동아일보 지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심문 내용과 공판 분위기를 전한 기사는 일제가 ‘독립’이란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사건 이름을 ‘육십 조선○○만세’이라고 표기했다. 법정 진술 중 민감한 내용은 여지없이 삭제됐다.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는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1심에서 대부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2심에서 징역 1년으로 형량이 높아져 1927년 9월에야 풀려났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이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87년 대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동참한 6·10민주화운동도 이들의 행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