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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에게 말합니다” 전파 탄 임정소식 300명 옥살이-고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낸 홍익범의 경성지방법원 형사소송 기록. 사진 제공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이십일일 오후 일곱시 평양의 라디오 수신긔마다 과격한 배일(排日)연설이 감전되엇다. 연설자는 류창한 일어로써 여자임이 분명하얏는데 과격한 배일연설은 칠분간이나 게속되어 만주문제와 국제련맹에까지 언급하얏다…이를 방지함에는 부득이 전력을 고도로 하야 이 전파를 구축할 수박게 업서 당국은 그 방지책에 부심하는 모양이다. ―동아일보 1932년 11월 26일자》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방송전파관제(管制)를 실시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했다. 선교사들은 본국 소식과 국제정세를 알기 위해 단파 수신기를 갖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수신한 내용을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얘기해주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홍익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932년 11월 26일 동아일보는 ‘금의환향한 홍익범씨 담(談)’이란 기사에서 “씨는 함남 정평 출생으로…1926년 미국에 건너가서 1930년 오하요주 떼닌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다시 콜럼비아대학 학사원에 입학하야…”라고 소개했다. 홍익범은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同志會) 활동에도 참가했다.
 
 
홍익범은 1940년 8월 동아일보 폐간 뒤에도 국제정세와 전황(戰況)에 대한 정보를 지도층 인사들에게 들려주었다. 홍익범은 이인 허헌 김병로가 주도한 ‘형사공동연구회’에서 조병옥 송진우 윤보선 안재홍 박찬희 등을 자주 만났다.
 
 
외국인 선교사 추방 이후 단파방송의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아동문학가 송남헌이었다. 송남헌은 경성방송국 편성원 양제현에게 단파방송 내용을 알려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미 방송국에는 단파방송을 듣는 조선인 직원들이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소리(VOA)’에 실어 보내는 국제정세와 중국 충칭(重慶) 임시정부 단파방송이 전하는 독립운동 소식은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해외에 산재한 2천3백만 동포에게 말합니다”로 시작되는 1942년 6월 13일 방송.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處處)에 끊어바리시오. 언제던지 어데서던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 해야만 될 것입니다.” 일제의 일방적인 승전 소식에 익숙한 조선인들에게 소름끼치는 ‘복음’이었다.
 

그해 말부터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고 방송인 150명, 일반인까지 합치면 300명이 소위 ‘단파방송 사건’으로 수난을 당했다. 이 사건은 잔혹한 고문으로 유명했는데 홍익범도 옥사했다. 홍익범의 증인으로 백관수(사장) 허헌(사장직무대행) 국태일(영업국장) 등 동아일보 출신들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홍익범은 송진우 김병로 이인의 이름은 끝까지 실토하지 않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시대가 열리면서 단파방송은 냉전 상대지역에 대한 정치선전용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KBS 월드라디오는 단파를 사용해 11개 언어로 재외 한민족을 비롯한 세계인에게 한국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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