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90eca3bceb8584eba19ceab3a0《신문은 당대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창(窓)이다. 1920년 4월 1일 창간 이후 동아일보의 지면은 우리 근대의 자화상이었다. 민족 교육과 민족혼을 고취하려는 계몽 활동, 국내외를 아우르는 독립 열사들의 활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신기술과 신문화를 비롯해 서구의 신사조가 새로운 풍속으로 이어졌다. 삼천리강산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단군과 충무공 선양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하는 운동도 동아일보와 함께 이루었다.》









브나로드 운동 전국 확산… 10만명 문맹타파


국권 상실이라는 뼈아픈 타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조선 사회는 1919년 3·1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주권의식과 자결 요구를 대내외에 알렸으며 이를 계기로 민족의 역량을 길러 일제로부터 광복을 도모하자는 흐름을 형성한다. 이 흐름은 창간 직후부터 동아일보에 생생히 나타났다.


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일제의 경성제국대 설립에 대응하여 1922년 11월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하기 9개월 전인 2월 3일, 동아일보 지면에는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민족세력의 고등교육기관 설립 필요성을 앞장서 제기한 것이다. 풀뿌리 성금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했던 이 운동이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동아일보는 1928년 창간기념일인 4월 1일부터 전국적인 문맹타파운동에 나선다고 선언했다. 총독부의 방해로 3년 뒤인 1931년부터 시작돼 34년까지 4차례에 걸쳐 펼쳐진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은 약 10만 명의 문맹자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제의 수탈에 항거해 벌인 조선물산장려운동,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도 지면에 소개했다.


윤봉길 의사등 잇단 의거… 국권회복 열망 키워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독립 열사들의 항일 운동도 멈춤이 없었다. 1925년 5월 14일 ‘대동단결을 역설한 임시정부의 교서’라는 동아일보 기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의 활동을 전해 국권 회복을 바라는 민중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앞서 1922년 9월 24일에는 시베리아의 대한독립군이 비행기를 구입했다는 소식이 지면을 장식했다. 1924년 4월 23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라, 우리는 민족이 먼저 살고야 볼 일이다’라는 기고문을 1면에 싣기도 했다.


의사와 열사들의 잇따른 항일투쟁 의거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의거는 사건 발생 후 이틀 동안 세 차례의 호외로 보도했다. 강우규 나석주 김익상 의사의 무력 투쟁도 현장 중계처럼 상세하게 지면에 나타났다. 이처럼 독립을 향한 염원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전해졌다. 1924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 국치일을 맞아 동아일보는 ‘기념이란 무엇인가’라는 1면 사설로 조선 민중이 이날의 수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봐렌다잉의 날에 낯설어하고… 모던보이에 떠들썩


근대 서구 사조가 유입되면서 동성애자의 자살 사건, 밸런타인데이 등 새로운 풍경이 빚어졌다. 동아일보 지면을 보면 당시 서구식 연애는 ‘상상이 먼저, 실천은 나중’이었다. 1926년 2월 12일에는 ‘절명의 애련, 어엽분 처녀와 순교자와의 사랑, 사랑하는 청년남녀가 염서(艶書)와 꼿을 밧고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봐렌다잉(밸런타인)의 날’이라는 서구 풍속이 소개됐다. 남녀의 정사(情死)와 가정파탄도 낯선 일은 아니었다. 기생 강명화와 ‘모던보이’ 장병천의 동반자살사건(1923년 6월 15일), 동성애자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 자살사건(1931년 4월 10일) 등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급격하게 변하는 남녀 관계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동아일보는 1926년 2월 25일부터는 3회에 걸쳐 1면 사설로 ‘현하(現下) 청년과 연애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카페의 여급 등 새로운 소외계층이 나오기도 했다. 1928년 3월 4일에는 ‘새로 살길을 발견한 듯 덤비는 카페의 웨트레쓰(웨이트리스)’라는 기사가 실렸다. ‘필경은 타락의 굴에 발디딜뿐, 홍등록주(紅燈綠酒)에 몸만 시들어간다’는 경고도 빠지지 않았다. 이 시대 광고란에는 ‘봄철을 보낸 늙은 세상사람의 젊어진다는 것은…’이라는 구호의 정력제 광고, ‘속치(速治)되는 임질약’이라는 성병 약광고도 흔히 나왔다.


레닌 혁명사상 유입… “동족분열 우려” 비판받아


동아일보 창간 직후인 1920년대는 니콜라이 레닌이 주도한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성공 이후 사회주의가 유럽을 넘어 세계 전역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곧 한반도로 유입됐다. 동아일보는 1922년 2월 18일 1면 사설 ‘사회주의적 운동에 대하여-우선 참된 연구가 필요’에서 사회주의의 장단점을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과격한 사회주의는 왕왕 계급증오와 동족분열의 우려가 없지 않다. 적어도 동족상애(相愛)와 인도적 색채를 띤 사회주의가 아니면 허무참담한 흑막을 연출할 것도 예상하는 바…'(1922년 10월 3일 사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을 소개하는 기사가 1921년 6월 3일부터 61회 장기 연재됐다.


노동자 농민의 쟁의도 잇달았다. 대표적인 사건은 전남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농민들이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해 1923년 8월부터 1년 동안 벌인 농민항쟁이었다. 동아일보에는 1924년 7월 16일 이 사건을 ‘타협이나 조화가 되지 않을 계급투쟁’이라고 지적하는 기사가 실렸다. 김일성부대의 보천보전투 승리(1937년 6월 4일) 소식도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됐다. 사건 다음 날에는 두 차례의 호외를 발행했고, 6∼14일에도 연일 2개 면씩을 할애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테레삐존 실험”… 탑동공원선 납량연주회 열려


“최근 영국의 ‘뻬아도(베어드)’ 씨는 런던의 ‘로얄 인스틔추손(로열 인스티튜션)’ 회원앞에서 자기가 발명하였던 전송기계 ‘테레삐존(텔레비전)’을 실험하고… 원리는 사진의 각 미세한 부분의 광선을 뎐파(전파)로 변화케하야 보내는 것입니다.”


‘활동사진의 대적(大敵)’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는 1927년 2월 22일 동아일보에 실렸다. 당시로서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미래의 일로 여겨졌지만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하루가 다르게 등장하는 놀라운 신기술을 접하고 경탄했다. 냉장고가 보급된 비율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동아일보는 1928년 6월 8일 실린 ‘여름의 가정지식 냉장고 이야기’를 시작으로 1939년까지 8회에 걸쳐 냉장고 이용법을 싣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라디오 방송시험’ 사실을 알린 것은 1925년 7월 13일이었으나 불과 12년 뒤에는 전국에 10만 대가 넘는 라디오가 보급됐다.


조선 민중들은 연극 콘서트 등 새롭게 접하는 장르의 작품을 한 모금의 샘물처럼 즐겼다. 동아일보는 창간 1년 4개월째인 1921년 8월에는 동우회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을 후원했다. 한국 문화의 열렬한 예찬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부인인 소프라노 야나기 가네코 순회독창회, 서울 탑동공원에서 열린 경성악대 납량연주회 등이 뒤를 이었다.


무용가 최승희 뉴욕 공연… 안익태 선생 해외 활약


세계를 무대삼아 활약하는 조선인들의 소식은 어두운 시대를 사는 겨레에 한줄기 빛이었다. 1938년 2월 7일에는 ‘무용사절 최승희 여사 도미공연 제1신, 세계 예술가의 메카 뉴욕 메트로에서 공연-동양인으론 최초의 전속 계약’이라는 제목으로 무용가 최승희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공연이 사진을 곁들여 보도됐다.


같은 해 음악 분야에서도 낭보가 전해졌다. 1938년 4월 16일 실린 “세계적 컨덕터 안익태씨 애란(愛蘭)악단서 폭풍적 격찬, 역사 전원생활 주제 대작 ‘조선’을 공연” 기사였다. 조선 민족이 낳은 대지휘자 안익태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대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바로 다음 날인 17일에는 ‘조선 고예술을 절찬, 감격한 불(佛) 르브랑 대통령’ 기사가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고전 무용을 격찬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어진 한국 예술가들의 활약은 이듬해에도 이어졌다. 1939년 1월 1일에는 ‘5개 국어로 역간되어 세계문단을 석권, 뉴욕대학교수 강용흘 씨의 위업’ 기사가 실렸다. 조선 예술인들의 해외 활약상을 모은 특집보도도 계속해서 나왔다. 1월 3일 2면에서는 안익태의 세계 순회공연 현황이 소개됐고 1월 4일에는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수 박영인과 최승희의 해외 활약상이 큰 사진 2장과 함께 상세히 실렸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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