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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34 : 스코필드 박사와 동아일보

Posted by 신이 On 1월 - 13 - 2010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석호필(石虎弼)’.




  석호필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 박사의 한국 이름입니다.


  정운찬(鄭雲燦) 서울대 교수가 총리 후보자가 되었을 때 ‘평생의 은인(恩人)’이라고 한 그 스코필드 박사입니다.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 박사는 1907년 캐나다로 이주, 의학자 겸 선교사로 있던 중 1916년 세브란스 의전(醫專) 세균학 교수로 조선에 왔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즈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사건이 일어나자 감시의 눈을 피해 제암리 일대의 현장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또 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柳寬順) 등과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잡힌 사람들의 수형생활을 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스코필드 박사는 동아일보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창간호 5면에는 그가 쓴 ‘조선발전(朝鮮發展)의 요결(要訣)’ 이란 장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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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 글에서 “조선의 장래에 대한 일대 희망은 조선인이 자고로 나태한 민족이 아닌 사실에 존재한다.”며 “조선인이 만약 성공을 기약한다면 그 길은 오직 하나다. 첫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며 둘째는 그를 진심전력으로 행(行)하는 것이다.”라고 설파(說破)했습니다.




  그는 조선 발전의 필요조건으로 1) 교육 2) 근면 3) 재정 4) 도덕을 들고 각 항목별로 세세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글 말미에 “나의 언사(言辭)에 불쾌한 점이 있었으면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 나라의 아름다운 격언,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다’는 진리를 생각하고 나를 용서하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 창간호 3면 ‘태형(笞刑) 폐지’ 기사 중 각계 인사들의 ‘말’에도 등장합니다.




  ‘九十度는 太甚(90대는 너무 심하다)’는 제하의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관청에서 허가하는 창기제도의 폐지와 아울러 태형의 폐지를 일심으로 주창하던 세브란스병원 의사 영국 의학박사 스코필드씨는 태형이 폐지하기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흔연히 말하되 과연 태형 폐지가 실행된다 함은 진실로 희소식이라. 나는 이 미개시대의 유풍이라 이를만한 이 형벌의 법률이 폐지되기를 간절히 기다린 지 이미 오래였더니 이번에 고국을 향하여 돌아가라 하는 전날에 이 소식을 들으니 조선 사람들과 얼마동안 작별되는 나의 마음에 적지 않게 기꺼운 일이라. 나는 평시에 태형을 당한 자와 실상으로 관계가 있어 볼기를 맞아 제 몸이 상한 자를 종종 치료하여 주었는데 죄를 지은 자가 형벌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되 태형으로 말하면 이십도까지가 극상이라 말하겠고 구십도까지 때리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이 형벌을 감당하기에 너무 혹독하였으며 또는 매를 잡는 하급 이속의 임의로 매를 때리는데도 공평치 못한 일이 많았던 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번 태형이 폐지된 일, 조선 사법계가 문명한 지경으로 향하는 증거이라 생각하노라.”






  스코필드 박사는 항일운동의 대가로 일제 고등계 형사의 밀착 감시, 암살 미수 등의 사건을 겪으며 동아일보 창간호가 나오던 날인 1920년 4월 1일 강압에 의해 조선을 떠나 캐나다로 귀국하게 됩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들은 ‘당시 봉급의 반씩을 털어’ 스코필드 박사 환송연을 마련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협력자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우리 동아의 사원들은 일인당 당시 봉급액의 거의 반액씩을 털어 모아 명월관에서 최고 호화판의 환송연을 베푼 일이 있다. 지금은 일류 요정이라야 그런 일이 없지만, 그때 명월관에서는 한 사람마다 따로따로 독상을 차려 내왔었다. 그 당시 점심 설렁탕 값에도 쩔쩔 매던 우리들 형편에 봉급의 반액씩을 주저 없이 떼어내어 환송회비로 바친 것은 단순히 기자로서의 호기뿐이 아니고 우리 독립운동의 은인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진학문, ‘구우회고실<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9월호)






  동아일보는 4월 13일자 2면에 ‘스 박사(博士) 횡빈발(橫濱發)’이란 제하의 동정기사로 그의 귀국 여정을 알렸습니다.






  “지난번(囊日)에 캐나다(加奈陀)를 향하여 출발한 스코필드 박사는 지난 9일 오후 1시에 요코하마(橫濱)를 출발하였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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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23일부터 5월 7일까지 15회에 걸쳐 ‘조선 통치 개량(改良)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이라는 논평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중 1회부터 7회까지가 ‘조선 통치 개혁-신제도에 대한 비평적 적극적 관찰 ’이란 부제를 단 스코필드 박사의 논평이었습니다. (편집자 주 – 이 논평은 3월 12~14일 재팬 어드버타이저 지<紙>에 게재된 것을 동아일보가 옮겨 실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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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14회와 15회는 ‘조선문제의 타(他) 일면’이란 부제를 달고 8회부터 13회까지 게재된 미국인 선교사 스미스씨의 논평을 반박하는 스코필드 박사의 논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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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스씨의 조선통치론에 대한 스코필드씨의 논박’이란 부제를 단 스코필드 박사의 논평 마지막 부분(15회)은 일제 당국의 검열을 넘지 못하고 발매반포금지 압수 처분을 받아 결국 삭제된 채 나갔습니다.




  이 논평은 앞서 스미스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을 위한 것이고 일제경찰의 고문이 없어졌다고 주장한데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논평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조선인의 비옥한 토지를 빼앗아 갔으며 또 구(舊)한국 정부에 접근해 수만 에이커의 전답을 강탈한 일을 고발하고 이어 일제경찰의 고문제가 폐지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경찰이 인두로 지진 젊은 여자, 손가락이 묶여 천정에 매달리고 전기고문을 당한 배재학당 학생들의 사례를 들어 반박했습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조선의 실정과 3·1운동의 전모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일제의 비인도적 처사를 폭로하는 일에 전념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6년 동안 여비를 모아 1926년 5월초 식민지 조선을 다시 찾았습니다.




  1926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스코필드 박사의 방문을 예고하는 기사가 그의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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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5일자 2면에는 드디어 그가 23일 아침 경성역에 도착했다는 기사를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조선의 지기(知己) 스코필드 박사


  유지(有志) 출영리(出迎裡)에 작조(昨朝) 입경(入京)


  ◇ 6년 만에 조선 땅을 다시 밟는 스코필드 박사는 재작일 아침 7시45분 경성역착 열차로 조선 친구들의 출영리에 서울에 도착하여 즉시 시내 서대문밖 밀러(閔休)씨 집으로 향하였는데 서울서 이틀을 묵어서는 함흥에 열리는 가나다 감리교 미순연회에 참석하러 함흥방면에 다녀오리라 한다. 박사는 원래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무하며 조선 사람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을 뿐 아니라 기미년 운동시와 그 후에 본국인 가나다로 돌아가서 여러 가지로 조선을 위하여 선전 등에 노력하였다.


  ◇ 6년 만에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오는 박사는 그때보다 약간 늙은 듯할망정 원기 왕성한 얼굴로 마중 나온 사람들을 쾌활히 맞으며 재담을 연발하면서 옛날 친구들의 소식을 묻고 마중 나온 이 중에 그의 어학교사이던 목원홍(睦源洪)씨와 서기이던 여병현(呂炳鉉)씨의 희끗희끗한 수염을 보고 옛날을 추억한다. 사진반이 사진기계를 향한 즉『동아일보 지금도 힘 있습니까』하고 웃는다.






  6월 27일자 5면에는 25일에 있었던 환영회 소식을 사진과 함께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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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를 두고 벼르던 조선을 재방문한 스코필드 박사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고 합니다.




  “노년의 스코필드는 그 때(편집자 주 – 1926년 재방문 때)를 회상하면서, 여러 가지 기억에 남는 일들 중에서도 인촌 김성수 댁에 초청되어 같이 간 다른 분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일이 더욱 인상 깊게 머리에 떠오른다고 한다. 그 때 그 자리에는 송진우, 장덕수, 3·1운동 전부터 계속해서 세브란스 의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오긍선 박사가 동석했다고 한다.” (이장락,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바람출판사, 2007, 163쪽)




  스코필드 박사는 그 해 7월 하순 다시 캐나다로 향했습니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스코필드 박사는 ‘사랑하는 조선 친구여’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동아일보는 9월 17일자와 9월 19일자 2면에 이 편지를 나눠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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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필드 박사는 이 편지에서 깊은 애정을 담아 조선의 장래, 조선과 교육, 실행이 제일, 근검 장려, 백의 폐지, 도덕 숭상이란 항목별로 세세하게 우리의 앞날을 위한 충언을 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3면에는 ‘나의 경애하는 조선의 형제여’라는 스코필드 박사의 서한(書翰)이 실렸습니다.


  1929년 3월 17일자 2면에는 관북재민(關北災民)에게 구제금으로 14달러를 동아일보에 보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 사장(송진우) 앞으로 크리스마스 축하편지를 보냈습니다.


  동아일보는 12월 26일자 1면에 이 편지를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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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사장 귀하


  나는『카나다인』이라는 것보다『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지금 크리스마스  카드를 드립니다. 난삽(難澁)한 세정(世情)을 장황하게 드리고 싶으나 제위(諸位)가 이미 주지하시는 바이며 또한 비애(悲哀) 뿐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위안제(慰安劑)의 한 가지를 고하고 싶습니다. 즉 그것은 내가 제위를 경애하며 또한 영원히 경애하는 것입니다. 1인의 경애라도 제위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감(減)하게 된다면 나는 이에 헌신하겠습니다. 제위가 제(弟)를 경호하여 주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의 부단한 환희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신(神)의 애(愛)인줄 언(言)하여 주십시오.


  위대한 인물인 김성수씨와 카나다에서 제와 같이 일야(一夜)라도 지내게 된 것은 제의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야(終夜)토록 조선에 관하여 담화하였습니다. 씨는 제위를 위하여 노력하셨습니다. 감사를 드리십시오.


  미국 뉴욕의 김활란, 김마리아, 장덕수씨 등과 상봉하였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선생들입니까. 여기는 그네들보다 우수한 이는 없습니다. 박인덕(朴仁德)씨가 카나다 대학에 내림(來臨)하여 조선에 관하여 연설하였습니다, 카나다인은 점차 조선을 이해하여 갑니다. 제도 항시 조선인에 관하여 연설합니다.


  선천인사(宣川人士)가 송물(送物)하여 주신 의복을 지난 여름(去夏) 제까지 입었습니다. 지금 폐의(廢衣)가 되어 입지 못하고 내가 항시 보는데다가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위의 사랑을 항시 기념합니다.


  개성(開城) 김정혜씨는 어떠하십니까. 용감스런 부인이십니다. 조선 여자는 남자보다 용감들 하십니다. 김 여사와 같이 조선을 위하여 다대한 노력을 하신 남자가 기하인(幾何人)이나 되십니까. 물론 다수인사가 계시겠지요. 제는 경애하는 이상재(李商在)씨를 잊지 않습니다. 청년 제위가 이상재씨와 같이 되신다면 조선의 위인이 되실 것입니다.


  성탄(聖誕)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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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가 고하(古下) 송진우선생에게 선물한 성경.(1918년 5월)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8월 광복 제13주년 기념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행사에 국빈(國賓)으로 초빙되어 이 땅에 다시 왔습니다.


  그 후 한국에 정착하여 서울대 수의과대학, 연세대 의과대학, 중앙대 약학대학에서 세균학 등을 강의했으며 보육원 후원과 젊은 지도자들의 양성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1960년 문화훈장,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스코필드 박사는 1970년 4월 12일 별세,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습니다.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 1968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단장) 받음. 1970년 4월 12일 영면. 향년 81세.” 


  그의 묘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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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필드 박사가 찍어 전세계에 알린 제암리 현장 및 3·1운동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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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박사 관련 동아일보 게재 목록 (일제시대)



게재일

면/단

제목

1920-04-01

3/3

九十度난 太甚 ,「스코필드」씨의 말

1920-04-01

5/1

스코필드(醫學博士), 朝鮮發展의 要訣

1920-04-13

2/8

스博士橫濱發

1920-04-23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一)

1920-04-24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二)

1920-04-25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三)

1920-04-26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四)

1920-04-27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五)

1920-04-28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六)

1920-04-29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七)

1920-05-06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十四)

1920-05-07

1/2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十五)

1926-06-05

2/8

朝鮮의 親舊 「스코필드」氏 十日頃에 入京[肖]

1926-06-25

2/4

朝鮮의 知己 「스코필드」博士 有志 出迎裡에 昨朝 入京/歡迎會 開催


[寫: 작일 아침 경성역에 도착한 「스코필드」씨와 그의 서긔이던 려병헌씨]

1926-06-27

3/1

남녀교제에 대하야, 여러 신진녀류의 의견과 「스코필드」박사담

1926-06-27

5/1

「스코필드」博士 歡迎會, 이십오일 성황리에 맛치어 意味深長한 博士의 付托

1926-07-01

5/9

「스코필드」 博士講演, 삼십일밤에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1926-09-05

2/5

「카나다」로 돌라가는 「스코필드」박사, 작일 아침 경성역에서[寫]

1926-09-17

2/1

조선의 친구여, (「카나다로」귀국 중인 「스코필드」氏 片紙)(一)

1926-09-19

2/1

조선의 친구여, (「카나다로」귀국 중인 「스코필드」氏 片紙)(二)

1927-01-05

3/1

나의 경애하는 조선의 형뎨여「스코필드」博士의 書翰

1929-03-17

2/6

「스코필드」博士 關北災民에 同情, 넉넉지 못한 녀비를 떼여 눈물겨운 十四弗

1931-12-26

1/6

敬愛하는 朝鮮兄弟에게[寫]





※ 朝鮮統治改良에 對한 外國人의 觀察(八)~(十三)은 미국인 선교사 스미스씨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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