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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31 : 시성(詩聖) 타고르와 동아일보

Posted by 신이 On 12월 - 14 - 2009

  ‘빗나든 아세아 등촉(燈燭)


  켜지는 날엔 동방(東方)의 빗’


  ◊ 동아일보 지상을 통하야 ◊


  타 옹(翁)이 조선에 부탁






  1929년 4월 2일자 2면  동아일보에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 1861~1941)가 보낸 넉 줄의 시가 실렸습니다.






  “일즉이 아세아(亞細亞)의 황금시기(黃金時期)에


  빗나든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朝鮮)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東方)의 밝은 비치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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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아래와 같은 기사와 함께 실렸습니다.






  이번 가나다(加奈陀) 려행 중 잠간 동경에 들린 인도시성(印度詩聖) ‘타고아’ 옹은 지난달 이십칠일에 마츰 십 년 전부터 일본에 망명 중인 인도 혁명가 ‘보-스’씨의 숙소를 왕방한 긔자와 서로 맛나게 되었는데 옹은 합장의 례로 흔연히 긔자를 마저주어 한번 조선에 오지안켓느냐 하는 긔자의 물음에 대하야


  네 고마운 말슴입니다. 그러나 래일이면 횡빈(橫濱)을 떠날터인데요…돌아오는 길이라도 와 달라고요? 미국으로부터 오는 길도 아마 일본에 못들를 터이니 딸하서 조선에도 갈수 업겟습니다. 래일 떠나기 전에 다시 맛납시다.


  하며 이튿날인 이십팔일 오후 세시에 횡빈을 떠나는 ‘엠푸레스 오푸 에시야’호에 옹을 작별하러 간 긔자에게 알에와 가튼 간단한 의미의 멧세지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야 조선민족에 전달하야 달라하얏다.






  그 다음날인 1929년 4월 3일자 2면에는 그 원문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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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인도 시성 타 옹의 멧세-지 원문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Rabindranath Tagore


  28th. March, 1929






  “당시 우리 민족의 암담한 처지에 대한 하늘의 깨우침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이 시를 읽고 몹시 흥분하였었다.” (조용만, ‘경성야화’, 도서출판 창, 1992년, 355쪽)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처음 소개된 이후 이 시는 ‘동방(東方)의 등불’ 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원래는 제목이 없는 ‘조선에 부탁’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아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던 타고르 옹의 이 넉 줄  메시지가 조선인에게 준 충격과 감동은 실로 컸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며 민족에게 희망을 줄 때면 곧잘 이 시를 인용하고 이 넉 줄 시를 모르는 국민은 없을 정도니까요.




  타고르 옹(翁)이 조선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송하기 전, 동아일보는 조선은 ‘동방의 빛’, 조선인은 ‘빛의 사도’라고 자부하며 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왔습니다. 개천절(음력 시월 초사흗날)을 맞아 1925년 11월 18일자 1면 동아일보는 ‘개천절(開天節), 조선 심경(心鏡)의 중요일(重慶日)’이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조선인 우리가 ‘동방으로서의 광(光)’의 사도이기는 아득한 옛날 옛적에서나 4천3백 년 전쯤으로 끊어 말하는 단군의 개천기원 당시에서나…똑같고 털끝만큼 다를 리 없는 것이다.”고 썼습니다.




  동아일보는 타고르 옹이 일본에 온다는 외신을 처음 접하고 그를 초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타고르 옹은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잠시 일본에 들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본사에서는 타고르 옹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로 하고 도쿄지국장 이태로에게 그 뜻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도 ‘아사히신문’만이 그와 접촉하였을 뿐, 다른 신문사는 접촉마저도 어려웠던 터였다. 도쿄지국에서는 숙고 끝에 도쿄 한국기독교회관으로 최승만(간사)을 찾아가….” (동아일보사사 1권, 1975년, 295쪽)




  주요한(朱耀翰) 당시 편집국장 대리는 “(최승만이) 이렇게 해서 만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마도 일본 측의 농간이 있어 타고르는 강연회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며 “그러나 요꼬하마를 떠나면서 타고르는 미국인 비서를 통해 강연회 못지않은 선물 – 한편의 시를 한국인에게 보낸 것” (주요한 문집 ‘새벽 I’, 요한기념사업회, 1982년, 52쪽) 이라고 밝혔습니다. 요꼬하마 부두에 정박 중인 배에 오르기 전, 전해 준 이 시를 본사로 우송받아 주(朱) 편집국장 대리가 직접 번역해 실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족에게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을 밝혀준 타 옹의 동정을 계속 보도했습니다.






  * 1929년 4월 25일 1면


  詩聖 ‘타고어’翁 卄四日 桑港發


 【桑港 22일 발】미국의 태도에 분개하야 귀국하는 인도 시성 ‘타고어’ 옹은 24일 桑港 발 대양환으로 일본에는 상륙치않고 귀국하기로 되엇더라.




  * 1929년 6월 11일 1면


  ‘타고어’翁 歸國, 東京에서


 【東京 9일 발】체동(滯東)중이든 시성 ‘타고어’옹은 8일 오후 2시 기우처(寄寓處)인 小倉那彦씨 邸를 출하여 비서 ‘친따’씨와 함께 횡빈에 부하야 9일 출범 귀도에 취하엿더라.






  타고르 옹은 인도로 돌아가던 중 다시 일본에 들르고 동아일보는 또다시 그를 초빙하지만 신병으로 후일을 기약합니다.






  ‘조선행 중지된 실망은


  이천만 동지를 일흔 듯’


  본사 초빙으로 조선 오랴든 타골 옹


  신병으로 중지돼 유감의 뜻을 표해 후약 남기고 타 옹 귀국


  (동아일보 1929년 6월 13일자 2면)






  미국의 초빙을 받아 도미하였다가 그 나라 관헌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인도로 돌아가는 길에 일본을 다시 방문하고 8월경까지 체재하기로 작정하였든 인도 시성 ‘타골’ 옹은 그간 우연히 심장병을 얻어 일시는 중태에 이르게 되어 동경제국대학 오(吳) 박사의 치료를 받든 중 옹은 주치의와 근친자의 권고로 모든 계획을 다 던져버리고 6월 9일 오전 7시 횡빈을 출범하는 불란서 기선 ‘안제-’호로 비서 ‘쨘다-’씨와 같이 ‘골룸보’에 직행하게 되엇다. ‘타골’ 옹은 지난달 중순 처음으로 기자를 만났을 때 자기는 다년의 숙망인 조선방문을 계획하는데 동아일보사에서 만히 힘써 달라고 말하였음으로 구체적 상의까지 되어 6월 중순에는 옹이 조선에 오기로 결정되었는데 돌연한 귀국으로 이것까지 중지하게 되었음으로 옹은 무엇보다도 제일 조선 못가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듯 일본을 떠나든 전날 기자를 청하야


  다음과 같은 의미의 ‘멧세지’를 주며


  최근까지도 될 수만 있으면 조선방문만은 단행하고자 하였든 것이 결국 여의치 못하게 되어 참으로 미안합니다. 이번 조선에 가고자함은 유람차로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도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어서 신음하는 민족과 동포가 되기를 바랏든 것임으로 조선 못가게 된데 대한 실망은 이천여만의 친고를 일흔데 대한 실망과 비등합니다.


  자기 생전에 꼭 조선을 방문하겠다하며 혹 건강이 회복되면 명년에는 조선을 들러 만주 ‘사비예트’ 로서아를 거쳐 구라파에 려행하겠다하더라.


  타옹 멧세지


  조선을 방문하여 동정의 인사를 마치고자하든 나의 언약을 신병으로 말미암아 지키지 못하게 됨은 내게 당하여 큰 유한이 올시다.


  나를 초빙하든 친고들에게 나는 이번 나의 언약을 다시 지킬 수 있는 미래의 조흔 기회에 대한 희망에 부치고 있다는 것을 단언합니다.


  1929년 6월 8일


  라빈드라나드, 타골




  It has caused me very great regret that my ill health prevents me from fulfilling my promise to visit Korea and to offer her my greeting of sympathy.


  Let me assure my friends who invited me that I carry that promise with me in the hope of a more fortunate future when it may be redeemed.


  Rabindranath Tagore


  1929 June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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