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 부농 집안 출신인 서승효(徐承孝, 1882~1964) 선생은 1908년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0년 국권이 무너지자 학업을 버리고 중국 상해로 임시정부를 찾았습니다. 상해로 간 그는 임시정부의 무력함에 실망, 얼마 후 상해를 떠나 만주 신흥군관학교(광복군 사관학교)로 가 조국 광복을 위한 군대와 인물들을 길러내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1920년 3.1운동의 기운이 싹트자 극비리에 경성에 잠입, ‘3.1운동에 이면 인물’로 활약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유광렬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서승효가 입국한 후, 조선광문회로 육당 최남선 선생을 찾아가 상의하고 3.1운동에 이면 인물로 힘썼다. 다만 국외에서 들어오는 사람을 눈을 붉혀 수색하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무슨 캄플라지를 해야겠는데 방도가 없었다. 육당은 그를 구제하는 방편으로 그때 매일신보의 편집장이던 이상협에게 말하여 그 신문의 교정부 기자로 은신, 일하게 한 것이 그의 기자생활의 출발이었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 서승효 선생’, 기자협회보 1969년 3월 21일자 4면)
이렇게 해서 신문기자가 된 서승효는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이삽협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 멤버로 들어와 정치면 편집을 맡았습니다. 동아일보 창간호의 도안과 편집은 그가 참여한 일생일대의 작품입니다. 동아일보 창간호 만큼 힘차고 균형 잡힌, 간결하면서도 할 말을 다한 지면은 없으니까요.
20여 년 간 그를 아끼고 도왔던 이상협은 그를 가리켜 “기사 안 쓰는 훌륭한 기자, 기사 못 쓰는 훌륭한 기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상협 당시 편집국장이 농 삼아 했으나 ‘농’을 모르는 이상협으로서는 대단한 칭찬의 말이었습니다. 내근 기자에게 하는 최상의 찬사였습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청빈하고 지사적 의지를 평생 굽히지 않았던 서승효는 신문사에서 받은 박봉을 국외로 나가는 독립투사들의 여비로 내놓았고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지들의 뒷바라지에 보탰습니다.
“서승효는 기자로서 한번도 외근으로 취재 활동을 해본 적이 없고, 논진(論陣)을 펴서 당당히 항쟁도 못하고 거의 평생을 편집이나 교정으로 보냈다. 세상에는 철저하게 항쟁으로 정열을 쏟는 이도 있는데 그는 젊었을 때 품은 애국심을 평생을 두고 간직하면서 주로 항쟁하는 이를 돕는 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그는 신문기자로 출세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을 하고, 또는 돕는 일을 하기 위해서 신문사에 적을 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 서승효 선생’, 기자협회보 1969년 3월 21일자 4면)
1924년 9월 다시 이상협을 따라 조선일보로 옮긴 그는 그곳에서도 정치면 편집을 맡았습니다. 일제의 압정이 극에 달했던 1942년 일제가 날조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 감옥에서 수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 서승효는 3년 후 조국 광복을 맞았을 때도 아무런 내세움 없이 묵묵히 신문사로 되돌아가서 평생을 내근 기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나 정치가가 될 수도 있었으나 평생을 내근기자로 신문 제작의 밀알을 자처한 시대의 양심이었다고 합니다.
1963년 4월 7일자 조선일보 5면에서 서승효 옹은
“지금 신문들은 참 만들기가 편하지. 그때(倭政下)만 해도 미리 검열을 맡은 기사인데도 생트집을 잡고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압수를 당하니 말야.”
“지금 기자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지. 왜정 때만 해도 어떻게 기사거리가 없었던지 특히 내가 맡아본 정치면은 기사거리를 얻기에 쩔쩔매었지. 그래도 그때 우리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다는 굳은 신념 밑에서 일했었지. 그래서 일본의 내각이 총사직을 해도 1단 이상으로 내준 일이 없었어.”라고 일제시대 신문 발행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에는 유달리 키가 큰 네 사람과 키가 작은 네 사람이 있어 이들을 ‘사거사소(四巨四小)’라 했다. 김을한은 홍종인, 김기진, 양재하와 함께 4거였고 신경순은 이건혁, 서승효와 더불어 4소로 불렸다.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 편’,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광복이 되자 각 정파나 단체들이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서승효에게 손을 내밀었다. 8.15와 함께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 해외에서 항쟁하다 돌아온 독립투사들 그리고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다 풀려난 독립투사들 대부분이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승효는 정계의 손짓을 뒤로한 채 묵묵히 복간된 조선일보로 돌아왔다. 직책은 지방부장이었다…(중략)…1939년 1월 서승효는 조선일보를 떠났다. 당시 사보는 ‘사원복무규율 제177조 제2항에 의하여 해임’이라고 적고 있다. 해당 규율은 정년제에 관한 것으로 부장 및 부장 대우의 경우 50세를 정년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서승효는 이미 만 57세였다. 그의 신분 보장을 위해 정년 이후에도 재직을 허용한 것으로 보인다…(중략)…1946년 9월 서승효는 마지막으로 조선일보를 떠났다. 그 후 동아일보 편집고문 등을 지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평생을 독립운동의 밀알로 살아온 그는 1962년(편집자 주 – ‘1964년’의 착오) 서울 근교 판자촌에서 숨을 거뒀다.” (‘조선일보 사람들-광복이후 편’, 랜덤하우스중앙, 2004년)
저랑 이름이 같은 분이어서 궁금했었습니다.
과연 어떤 분일까? 훌륭한 분이셨네요..
저도 비록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본받아야 할 점이 많아서 글 남겨요.
Comment by 서승효 — 2010/05/24 @ 2:13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