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그(이길용)에 앞서 동아일보의 체육 기사를 담당한 이는 평북사람 변봉현(邊鳳現) 씨였다. 그는 우리나라 마라톤 기사를 쓰는데 국제 기록과 비교를 하면서 체육 기사를 감명 깊게 쓰던 사람이었다.” (창간 기자 유광열,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년, 331쪽)






<1920년 5월 18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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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상경기대회와 세계기록의 비교


  인천, 경성 사이 25마일 경주의 1,2등 선수의 경주 시각과 세계 경주계 기록과의 비교


 ◇ 세계기록 2시 36분 34초


  ◇ 임일학군 2시 45분 11초


  ◇ 조창환군 2시 46분 02초






  와세다대학 영문과 재학 당시 야구선수였던 변봉현은 유학생 야구단이 모국을 방문할 때 선수단원으로 두 차례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국내 야구단과 경기를 가지고 야구 지도를 한 적도 있던 스포츠맨이었습니다. 191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평북 박천에서 지내다 와세다대 2년 선배인 설산 장덕수의 소개로 창간 기자로 입사, 동아일보 최초의 체육 담당 기자가 됐습니다.




  그는 창간된 지 10일 뒤인 1920년 4월 10일자부터 12일자까지 4면에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글을 3회에 걸쳐 썼습니다. 평파(平波)는 변봉현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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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10일자 4면



 




  체육 기관의 필요를 논함(1회)


  “시대가 일변(一變)하니 활기 우내(宇內 · 천하)에 충만하도다. 세계의 전 인류는 동(動)하고 뛰고 난다. 일층 활발히 일층 맹렬히 분기하야 활약한다. 생명력이 보다 더 팽창하고 생명력은 보다 더 절실히 감(感)한다. 용감히 살려함이 이상이며 노력이도다…(중략)…이때에 만국 국제적 운동경기대회인 올림픽 대회는 오는(來) 8월에 벨기에의 수도 브랏셀에서 개최(開)하게 되었다. 국제 올림픽 대회! 아- 이는 실로 오인(吾人)에게 무량한 감념(感念)과 무한한 감개를 준다…(중략)…아! 우리가 왜 이에 참가치 못 하는고! 권리가 없는 바인가. 부(否)라, 자기의 있는 권리를 사용치 안음이니…(중략)…각성하라. 운동에 대해 크게 각성하라. 열(熱)과 역(力)을 내어 운동에 대하여 큰 열(熱)과 큰 역(力)을 쓰라…(중략)…오인(吾人)은 이에 장래의 운동계를 위하여 기관을 설립함이 자금(自今)의 급무(急務)요 요무(要務)며 이론보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겠다…(중략)…차제에 조선 운동계를 개탄하는 유의(有意 · 뜻있는) 청년들은 절(絶 · 절실)히 공명하야 궐기하야…(하략)….”






  변봉현 기자의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조선인들을 위한 조선인들의’ 체육회 결성 움직임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






  “동아가 창간되던 해에 우리 일본 유학생들이 축구와 야구팀을 짜 가지고 고국 원정을 오게 되었지요. 서울서는 야구 축구 관계인들이 각각 별도로 환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축구 편의 준비를 맡았던 나는 어느 날 야구 편의 준비를 맡고 있던 직장 동료 변봉현 씨와 담소하는 가운데, 환영회를 따로 할 것이 없이 공동으로 하자는데 합의했어요. 또 이번 모임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 체육 활동 전반을 주관할 상설기관을 결성하자는 데도 뜻을 모으고 장덕수 씨 등 신문사 간부진에 전달하였어요. 신문사에서도 우리 뜻에 적극 찬동해 그 뒤 조선체육회 결성 운동의 중심체가 바로 동아가 된 것입니다. 그 발기인 명단을 보면 거의 동아의 연고자나 전국 각지의 지국들로 되어 있어요.” (김동철, 사사 1권, 193쪽)






  변봉현 김동철, 두 기자의 노력과 체육 동호인들의 호응으로 ‘조선체육회’ 창립 준비위가 열리게 됩니다.






  “1920년 6월 16일 인사동 명월관에서 50여 명의 유지가 참석해 변봉현 김동철을 포함한 10명의 창립준비위원을 선출하고 그 중 연장자인 윤기현(尹冀鉉)을 위원장으로 호선(互選)하였다.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스포츠 애호가, 각 학교의 대표적 인물, 친일적 색채가 없는 사회유지 등 90여 명을 발기인으로 선정하였다. ‘그 중 사회 인사의 태반은 당시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가 천거하였다.’고 하며, 이 90여 명 가운데 본사 관계자로 인촌 김성수, 장덕수(주간), 이상협(편집국장), 진학문(정경부장), 김명식(논설반원), 김동철 한기악 변봉현 기자, 그리고 지국장으로 송제원(신의주) 안희제(부산) 이창석(선천) 하상훈(인천) 등 12명이 포함되었다.” (사사 1권, 193~194쪽)






  조선체육회가 창립(1920년 7월 13일)된 뒤 7월 16일자 동아일보 1면에 ‘조선체육회에 대하여’라는 장덕수 주간의 사설이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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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보라. 오인(吾人)과 같이 경기장에 입(入)한 다른 민족을. 혹은 백보를 앞서고 혹은 천보를 앞섰도다. 이를 추종하여 그와 동등한 문화의 전(前)에 참여코자 할진대 백배 천배의 노작(勞作)을 오인(吾人)은 가(加)하여야 할지니, 슬프다 형제여, 오인(吾人)의 체력은 능히 그를 허(許)하는가. 보라 서양인의 체격과 오인(吾人)의 그것과를, 또는 그의 에너지와 오인(吾人)의 그것과를, 그 추(醜)함과 열(劣)함이 어찌 이에까지 과대(過大)하였던고…(중략)…민족의 발달은 건장한 웅강(雄剛)한 신체로부터 내(來)한다고…(하략)….”






  대한체육회 창립기념일(7월 13일)에 낭독하는 ‘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도 장덕수 당시 동아일보 주간의 작품입니다.


<조선체육회 창립 취지서>


  보라, 반공(半空 · 그리 높지 아니한 공중)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


 그 얼마나 웅웅(雄雄)하며 의의(毅毅)한고? 천지에 흐르는 생명은 과연 총동(總動)하는 도다.




  보라! 공중에 나는 빠른 새와 지상에 기는 날랜 짐승을! 그 얼마나 강건하며 민첩한고.


  천지에 흐르는 생명은 과연 웅장하도다.




  희(噫)라! 천지의 만물은 오직 생명의 한 덩어리로다.




  사람은 원래, 이 약동의 생명과 충실의 생명과 웅장한 생명을 수(受)하여 생(生)한지라. 그 신체는 다시 소나무와 같이 웅건하매, 그 정신은 다시 일월과 같이 명쾌할 것이어늘, 이제 그러하지 못하여 그 안색은 다색(茶色)같이 아무 광채가 무(無)하며, 그 신체는 세류(細柳)의 마른 가지 같아서 아무 기력이 무(無)하고 정신이 오직 혼미함은 하고(何故)요?




  이는 안일한 생활에 떨어지며 숙리 없는 처신에 빠져서 천리를 거슬러 생명의 창달을 도모치 못함이니, 이 개개인의 불행을 작(作)할 뿐 아니라 국가사회의 쇠퇴를 초래하여 현재에 지(止)할 뿐 아니라 또한 장래에 유전하여 써 자손에 급(及)할지니, 정(正)히 멸망의 도(途)를 자취(自取)함이라, 그 어찌 오인의 한심(寒心)할 바 아니리요.




  차(此)를 회복하여 웅장한 기풍을 작흥(作興)하며 강건한 신체를 양육(養育)하여 써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며 개인의 행복을 기망(企望) 할진대, 그 도(途) 오직 천부의 생명을 신체에 창달케 함에 재(在)하니, 그 운동을 장려하는 외(外)에 타도(他道)가 무(無)하도다.




  우리 조선 사회에 개개의 운동 단체가 무(無)함이 아니라. 그러나 이를 후원하며 장려하여서 조선 인민의 생명을 원숙 창달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의 흠여(欽如)함은 실로 오인의 유감이고 또한 민족의 수치로다. 오인은 자(玆)에 감(感)한 바 유(有)하여 조선체육회를 발기하노니, 조선사회의 동지 제군자(諸君子)는 그 내(來)하여 찬(贊)할진저.    1920년 7월 13일






  동아일보의 창간은 한국 체육사에도 길이 남을 단초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입니다.




  조선체육회 창립 후 변봉현은 향리에 학교를 세우려는 뜻을 품고 퇴사해 애쓰다가 기부하는 이가 없음을 비관하여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변봉현 씨 장서(長逝)


  야구계의 큰 손실


  전 본사 사원으로 평안남도 안주 대흥학교 교장으로 있던 변봉현 씨는 지난 14일 새벽에 안주에서 돌연 장서하였다는데 씨는 일찌기 동경에 가서 조도전에 다닌 일이 있고 귀국한 후에는 교육에 종사하였으며 재작년 본사 창간 당시에 사원으로 입사하여 건필을 들었으며 씨는 특히 무엇보다도 운동계에 취미를 많이 가져서 일본에서도 ‘와세다’의 선수로 이름이 높았으며 조선 야구계에 굴지하던 인물인데 이와 같이 일찍 불행함은 씨의 자신을 물론이오 우리 운동계를 위하여서도 불익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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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2년 2월 17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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