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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24 : 일장기 말소사건의 진실과 왜곡(3)

Posted by 신이 On 10월 - 1 - 2009

  넷째, ‘279일의 정간이 끝나고 1937년 6월 3일자 석간 속간호를 내면서 사고를 통해 친일 언론 서약을 했다.’는 비난은 그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겉으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흠을 잡는 단면적 주장입니다.


  사고의 원안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사고(社告) 원안


  낭자(曩者 · 지난번) 본보(本報)에 있어서 일장기 마크 말살사건을 야기(惹起)하야 당국(當局)의 기휘(忌諱)에 촉(觸)하게 된 것은 실로 공축(恐縮)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당국(當局)으로부터 발행정지해제(發行停止解除)의 관대(寬大)한 처분(處分)을 받어 금후(今後)부터 일층(一層) 근신(謹愼)하야 경(更)히 여사(如斯)한 불상사(不祥事)를 야기(惹起)치 않도록 주의(主意)할 것은 물론(勿論)이어니와 지면(紙面)을 쇄신(刷新)하는 동시(同時)에 언론기관(言論機關)으로서의 공정(公正)한 사명(使命)을 기(期)하려 하오니 독자 제위(讀者 諸位)께서는 조량(照亮 · 사정을 살펴)하시와 배전 애호(倍前 愛好)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위와 같은 사고 원안을 총독부에서 다음과 같이 수정, 첨가하며 ‘주서(朱書 ·빨간 글씨)와 같이 기입(記入)할 것’ 이라는 인장을 찍어 수정을 강요해 싣도록 했습니다.




  수정된 사고(社告)


  낭자(曩者) 본보(本報)에 있어서 일장기 마크 말살사건을 야기(惹起)하야 당국(當局)의 기휘(忌諱)에 촉(觸)하게 된 것은 실로 공축(恐縮)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당국(當局)으로부터 발행정지해제(發行停止解除)의 관대(寬大)한 처분(處分)을 받어 금후(今後)부터 일층(一層) 근신(謹愼)하야 경(更)히 여사(如斯)한 불상사(不祥事)를 야기(惹起)치 않도록 주의(主意)할 것은 물론(勿論)이어니와 지면(紙面)을 쇄신(刷新)하는 동시(同時)에 언론기관(言論機關)으로서의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大日本) 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公正)한 사명을 다함으로써 조선통치의 익찬(翼贊 · 제왕의 정치를 잘 도와서 인도함) 기하려 하오니 독자 제위(讀者 諸位)께서는 특히 조량(照亮)하시와 배전 애호(倍前 愛好)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붉은 색이 수정, 첨가된 부분임)




  그 증거물은 동아일보 사사 1권 374쪽에 실려 있습니다.




11

총독부가 수정한 속간 사고 문건



 


2

1937년 6월 3일자 석간 1면 사고







  강제 정간 279일 만에 간신히 속간되려는 시점에서 일제의 이 같은 강압을 거부하고 신문 발행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 ‘나 같으면 강압에 굴하느니 신문 발행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문 발행을 포기하면 무기를 없애는 것과 같다.’며 후일을 기약하자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언론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이 문제로 동아일보를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론 현장에서 그 같은 굴욕을 용케도 참아 낸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일제는 군사독재보다 관대한 체제였을까요?


  조선총독부 경무국 비밀문서 조보비(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은 그 과정을 자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 전문(全文)


소화 12년(1937년)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각 도지사 전

척무성 조선부장 전

조선헌병사령관 전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전

관동국 경무부장 전

경무국 동경 파견원 전


주제의 건, 별책과 같이 송부함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


동아일보는 소화11년(1936년) 8월 25일부 지상에 국제올림픽대회 선수 손기정의 사진의 가슴사이 일장기 마크를 지워버리고 게재했다는 의심이 컸으므로 급히 서둘러 발매 배포를 금지하고 그 실정을 조사한 결과 신문사 사진부 기자 수명이 제국의 국기가 지면에 나오는 것을 기피하여 약품을 응용하여 고의로 이것을 지운 것으로 판명되어 8월 27일 부로 단호히 그 발행을 정지처분 하기에 이르렀다.

발행 정지의 명령에 접한 동아일보에서는 발행책임자인 사장 송진우를 비롯 편집국 간부일동은 파랗게 질려서 당국에 그 죄과를 빌고 일체의 기관의 운전을 정지하고 신문 기타 경영에 관계된 월간잡지 신동아와 신가정을 무기 휴간하는 등 근신의 의사를 나타냈다. 지금까지 동아일보는 단지 이번 국장도말(國章塗抹)의 사진을 게재하여 조선민족의식의 고양을 선동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평소 민족주의 선전기관이라고 자타가 모두 인정, 기회 있을 때마다 이와 같은 비국민적 거조(擧措 · 행동)로 나올 잠재의식이 암암리에 있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당국으로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 발행을 정지하고 반성의 여지를 주어 영원한 유상(謬想 · 틀린 생각)을 시정함으로서 근본부터 그 지도 정신을 청산시키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고 판단돼 필요한 수단을 강구하여 참으로 혁정(革正)의 희망을 본 후에 해제하는 방침을 정하였다.

먼저 사장 이하 이번 사건의 직접 책임자와 사원 중 요시찰인, 요주의인 등 불량분자를 퇴출하고 사내의 진용과 분위기를 일신하는 동시에 특히 사장의 인선에 가장 중점을 두어 온건 공정한 사람을 선임하고 서로 신뢰하여 참으로 혁신의 실효를 올릴 수 있도록 다음 각 항의 실행을 전달하였다.


(1)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인책사임 할 것.

(2) 발행 겸 편집인 명의는 새 사장으로 족할 만한 사람으로 변경, 수속을 이행할 것.

(3) 사장, 부사장, 주필, 편집국장의 임용에 있어서는 미리 당국의 승인을 얻을 것.

(4) 당국에서 부적절하다고 인정하는 간부와 사원, 그리고 사건 책임자를 면출(퇴출)하고, 동아일보 사내의 다른 직무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할 것.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송진우(宋鎭禹, 사장, 政要 · 정치적 요시찰인), 장덕수(張德秀, 부사장, 政要), 양원모(梁源模, 영업국장, 政要), 김준연(金俊淵, 주필, 特要 · 특별 요시찰인), 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政要), 이여성(李如星, 조사부장, 政要), 박찬희(朴讚熙, 지방부장, 特要), 최승만(崔承萬, 잡지부 주임, 普要 · 보통 요시찰인), 이길용(李吉用, 운동부장), 신낙균(申樂均, 사진과장), 현진건(玄鎭健, 사회부 기자), 장용서(張龍瑞, 사회부 기자), 서영호(徐永浩, 사진부원) 이상 13명


(5)새로이 동아일보 발행 명의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당국의 지정하는 항목에 따라 지면의 쇄신에 서약할 것.

(6)위 신도(申渡 · 위에 말한 사항)는 사장 송진우 그리고 양원모에 대해서 하고, 김성수, 송진우, 양원모 3인은 금후 책임을 지고 일체의 처리를 수행할 것.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사건 책임자의 사직만을 발표하고 기타 불량분자의 정리는 새 사장의 손에 위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장 후보자의 천거에 있어서는 김성수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전남그룹(group)’중에서 동아일보의 전통적 반일정신에 물들인 자로서 김성수와 송진우의 괴뢰와 같은 자를 선정할 것을 고집하여 한발도 양보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입으로는 개전(改悛)을 말하면서 내심은 갖은 모략과 유언과 탄원에 의해서 초지의 관철을 시도하고 다만 그 아성을 지키려고 급급하여, 추호의 성의도 인정할 수 없음으로 당국이 용인할 수 없어 결국 인선난에 빠져 시일을 허송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사는 70만원 1만4천주(1주 50원 반액불입)의 주식회사이나 사장인 송진우는 발정전(發停前) 겨우 100주를 가지고 있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전년 사장인 김성수는 300주를 소유하고 그 형제, 처자 기타 일족의 명의를 합하면 그 회사 주식의 과반수는 김성수의 수중에 장악되어 회사는 첫째로 동인의 의지에 따라서 운전경영 되며 송진우는 실은 그 대행자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 사장의 지위를 사임하는 이상 당연한 귀결로서 김성수가 스스로 출두하여 금후의 선처를 서약함으로서 과거의 죄과를 사죄하고 발행의 전 책임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깨끗하게 하지 않고 “절대로 사장에 출마하지 않고 또 동아일보 내부의 일에 관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 증거로서 자기가 그의 처 외에 1명의 지주 4710주를 무상 또는 무조건으로 송진우 에게 양도하는 행위로 나오며 이것은 명백히 사장의 지위를 물러난 송진우로 하여금 지주의 실권에 의해서 중역으로서의 지위를 사내에 확보하게 하고 金의 대행을 宋, 宋의 대행은 신 사장으로서 이전처럼 동아정신의 의발(衣鉢)을 신 사장에게 양도하고 배후에서 이것을 조종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이와 같은 정세 하 에서는 가령 사장을 경질하고 간부를 새롭게 하는 것은 유명무실로 끝날 것 이므로 당국에 있어서는 이에 대한 발본색원적인 대책을 필요로 함으로 차기 사장을 비롯하여 간부는 김성수 내지는 송진우의 괴뢰가 아닌 십분 개선의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를 전하였다. 또한 회사의 실 세력에 대해서 형벌을 가하여 실권을 새 사장에 옮기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아일보를 취하느냐 마느냐 하는 김성수 내지는 송진우에게는 받아들이기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로서, 그들은 동아일보를 완전히 그들의 수중을 떠나게 하는 일을 저지하는데 여러 수단을 다하여 부심하였다.

그들은 사장 후보자를 천거하는데 있어서 첫째는 자기의 의중을 체현하는 인물을 가지고 암암리에 회사의 해산까지도 걸고 그 이념단체를 사수하려는 것으로 기울어져 감히 한치도 양보하려는 모습이 없었다. 먼저 이번에 정리를 명령한 정요(政要) 영업국장 양원모와 부사장 장덕수를 끌고 와 사장으로 추천했으나, 거절당해 다음 사장 후보자로 사원이며 김성수의 인척인 고재욱(高在旭), 다음에는 그의 경영하는 보성전문학교장으로서 심복 부하인 김용무(金用茂), 다음에 동향인으로서 열열한 공산계 민족주의자로 지목받은 김병로(金炳魯) 등을 밀어 붙여 수중에서 동아일보를 잊어버리려고 하지 않고 당국의 의도를 준수하려는 성의가 부족함으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우연히도 당국이 용인하는 김연수(金秊洙, 해동은행 중역으로서 유력한 실업가)와 문상우(文尙宇, 해동은행 중역)는 무엇 때문인지 본인이 취임을 거절하는 등 더욱 인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에도 태도를 바꾸지도 않고 자포자기적으로 “당국은 당초부터 해정의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서 무단정치의 재현이다”라고 선전하여 음(陰)으로 양(陽)으로 수단을 다 함으로서 조건완화를 꾀했다. 또 “현 중역 외에서 사장을 선임할 때는 반드시 동아일보는 자멸하므로 이에 먼저 스스로 폐간하고 전업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이에 당국은 궁지에 빠질 것이다”라고 말을 퍼뜨렸다. 이렇듯 오로지 당국에 대한 견제와 사원 및 사회에 대한 기반을 일삼아 고집스럽게도 반성의 빛이 없음으로 본건 해결은 오래 정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국의 방침은 미동도 하지 않고 이 회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태도를 계속할 때에는 자연폐간 될 것이며 당국의 아는 바 아니라는 취지를 통고하고 수차에 걸쳐 사장 후보자의 추전을 종용(慫慂)한 바 있으나 효과가 없었다. 드디어 5월에 들어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기로 하고 당국의 기정방침에 따라서 해결에 응하는 힘이 부치면 속히 폐간계를 제출하도록 권고했다. 당국의 태도가 의외로 강경함에 놀라는 것과 동시에 긴 세월에 걸쳐서 의식(衣食)의 자원이 끊겨 호구지책에 궁하는 다수 사원 직공의 요청과 큰 손해를 입음으로서 재기가 곤란해지는 등 재정적 곤경을 생각할 때 이 이상 해정이 지연되게 되면 폐간은 어리석게도 주식회사의 파탄을 초래한다고 깨달아 그 후부터 타협적 태도로 나왔다. 급거 중역회를 소집하여 백관수(白寬洙), 옥선진(玉璿珍) 등 2명을 선출하여 제시했고 5월 12일 다음과 같이 어원서(御願書)라는 것을 제출하였다.


어원서 (於願書)

이번 불상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죄송스럽고 정간 후에 벌서 10개월이나 경과하여 본사를 비롯하여 전 조선에 걸쳐 기천(幾千) 지분국(支分局) 가족들의 생활상은 참으로 비참하여 좌시할 수 없음은 물론 스스로 뉘우침으로서 앞서 일을 거울삼아 금후에는 이러한 잘못이 없도록 깊이 반성할 것이므로 각별한 동정과 관대한 양찰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본건의 해결에 있어서는 당국의 의향에 따라서 할 것을 바라오니 무엇보다 빨리 해금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나이다. 후임 사장에 대하여는 여러모로 고심한 바 있음으로 금후 경영의 관계 상 따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사료되어 그간 상신한 자 가운데 특히 지정해 주시기를 부탁하나이다.

소화12년(1937년) 5월 12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대표 양원모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전


위 탄원서에 의하면 무사태평하지만 당국의 의사를 알고 이것을 준수하여 금후에 선처하려는 저의가 있음을 읽을 수 있음으로 다음 각 항을 지시하고 이것을 이행하는 조건으로서 백관수를 사장으로 하는 것을 동의한다는 취지가 명시되고 백관수 스스로가 나서서 이것을 받을 것을 서약했다. 그 후 몇 번 곡절을 겪은 후에 드디어 송진우 일파도 굴복하고 전면적으로 이 조건을 이행하고 완전히 손을 뗄 것을 약속함에 이르러 일단 해정(解停)을 내락(內諾) 승인함으로써 주주총회 소집의 수속을 하게 하였다.


하명한 조건

1. 서약서를 제출할 것(별지 제1 참조)

(1)지도 정신의 시정

(2)지면 쇄신 개선 요항의 준수(별지 제2 참조)

(3)불량 사원의 정리 및 재임용의 승인(앞서 말한 13명 지명)

(4)사장 즉 발행명의인으로서 원칙 엄수

(5)사장, 부사장, 주필, 편집국장의 임명 및 선임의 승인

(6)위 서약사항 위반의 경우 제재

2. 전 사장의 소유주를 신 사장에게 양도할 것

3. 전 사장은 취체역을 사임할 것

4. 해정에 이르러서는 사고를 게재할 것(별지 제3 참조)


<별지 제1>

서약서

본사 발행에 관계되는 일간신문 동아일보에 있어서 앞서 일장기 마크 말소사건을 야기한 것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 견딜 수 없다. 차제(次第)에 새로운 사장이 발행인으로서 허가되는 발행정지처분 해제의 은명을 입은 이상 종래의 잘못된 민족적 지도 정신을 청산하는 것은 물론 언론 기관의 중대한 사명을 거울삼아 황실국가에의 충근(忠勤)에 앞장서며, 조선 통치를 성실히 보좌할 방침입니다. 별지 항목에 따라 맹세코 지면의 쇄신을 실행하고 과오 없도록 기약하겠습니다. 더욱 이번 정리를 명령한 간부와 사원은 빨리 면직하여 금후 당국의 승인 없이는 다시 선임하거나 또는 임명할 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또 사장과 부사장 주필 편집국장의 선임에 있어서는 당분간 당국의 승인을 받음과 동시에 필히 발행인 명의인 즉 사장의 원칙을 엄수할 것을 서약하고 불신행위가 없도록 기할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위반할 때에는 어떠한 처분을 받아도 이의가 없을 것을 서약합니다.

소화12년 6월 1일

주식회사동아일보사장 동아일보 발행인 백관수

경무국장 三橋孝一郞 전


<별지 제2>

언문신문 지면쇄신 요항


1. 황실기사는 특히 그 취급을 정중히 하여 지면의 상단 중요한 장소에 삼가 기재하고 더욱 오자 탈자 등이 없도록 기약할 것.

1. 황실 및 국가, 국기, 군기 신사 등을 숭상하여 국체명징, 국위선양에 노력하여 국가의 경절(명절)과 기타 연중행사 의식 제례 등의 기사는 정중하게 취급하고 이것을 크게 보도할 것. 더욱 될 수 있으면 그 사진을 게재할 것.

1. 황실 및 국가의 경사에 대해서는 회사로서 자발적으로 축하의 뜻을 표할 것.

1. 외국 전보 등으로 하여금 제국의 불리한 보도를 특히 대서하지 말 것.

1. 총독, 총감 기타 내외지의 현관귀빈(顯官貴賓)의 동정은 성의를 가지고 보도할 것.

1. 총독의 유고(諭告), 여러 관청의 발표사항과 지사회의, 중추원 회의 등 중요한 관청의 여러 회의는 빼놓지 말고 이것을 보도할 것.

1. 당국의 시정 시설에 대해서는 민족적 편견을 버리고 국가적 관점에서 이것을 보도하고 비판은 공명정대를 기할 것.

1.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의 범죄에 관한 기사 및 국외불령(不逞)운동의 기사를 과장해서 취급하거나 또는 호의적인 명칭을 사용하거나 혹은 상휼적(賞恤的) 문자를 쓰지 말 것.

1. 소련의 선전적 통신을 좋아해서 등재하는 것과 같은 것을 기피할 것.

1.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있는 논문, 소설 등은 이것을 배격할 것.

1. 농촌진흥 자력갱생 등의 운동 및 이민 노동자 알선 등의 사업을 성원하고 민중을 격려 고무하는 양 노력할 것.

1. 천재사변일 때 에는 해당관청의 구제사업을 성원하고 결코 민심을 교란하여 민중의 의기를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1. 제 멋대로 조선 민족의 궁핍을 왜곡하여 민중 생활의 비참한 상황을 나열하는 것과 같은 폐단을 없이 할 것.

1. 노동, 소작 기타의 쟁의에 관한 기사는 사안을 규명하여 곡부, 즉 잘잘못을 가려 공평한 보도를 제일로 하고 더욱 그의 격화를 조성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도록 할 것.

1. 조선의 역사적 인물, 산악, 고적 등에 관한 기사, 기타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배일사상을 고조하는 것과 같이 싫어하는 기사는 게재하지 말 것.

1. 내선인 간의 충돌사건에 관한 기사는 그 취급을 신중히 하고 민족적 대립을 유도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도록 할 것.

1. 존황경신(尊皇敬神)을 목적으로 대일본 제국의 신문지다운 사명을 완수하도록 노력할 것.

1. 기타 반국가적 또는 공산주의 민족주의 적인 언론 보도를 하지 말 것.


<별지 제3> 사고


앞서 본보에 있어서 일장기 마크 말살사건을 야기 시켜 당국의 기휘(忌諱)에 촉(觸)하게 된 것은 실로 공축불감(恐縮不堪)하는 바이다. 이제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 해제의 관대한 처분을 받아 금후(今後)부터 일층 근신하야 다시는 이와 같은 불상사를 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면을 쇄신하고 대 일본 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公正)한 사명을 다하야서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 독자 제위께서는 특히 조양(照亮)하시와 배전의 애호를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동 아 일 보 사


그 후부터 회사 측과의 교섭은 바로 일사천리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송진우의 지주 4,810주중 4,000주를 백관수에 양도수속을 끝내고 5월31일 임시주주총회 석상에서 취체역 김성수와 송진우 두 사람은 인책 사임했다. 보결선거 결과 백관수와 현준호(玄俊鎬, 중추원 참의)가 당선하여 바로 중역회를 열어 백관수를 사장으로 선임하고 이에 따르는 법적 수속도 정식으로 끝났다. 이와 같이 파란중첩한 경위를 거쳐 9개월여 만에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와 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조건 일절을 이행 완료하여 지면 쇄신의 전망을 확실히 했다. 이제 와서는 더 이상 지연시켜 고경(苦境)에 신음하게 하여 자포자기의 궁지에 몰아넣는 것 보다는 해정(解停)에 의해서 빨리 개선의 서약 성명을 지상(紙上)에 실행하게 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사료되어 6월 2일부로 해정의 지령을 발표하게 이르렀다. 사회 전반에 대해서도 정간 중에 취한 당국의 태도가 일반 한글 신문 및 잡지계 오랜 폐단인 소위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편견의 지도 정신을 근본적으로 타파하는데 있음을 알게 함으로서 일징타계(一懲他戒)의 실효를 올리기 위해서 삼교(三橋)경무국장은 말미에 첨부한 것과 같이 정견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이제야 전혀 왕년의 동아가 아니고 그릇된(謬見的) 지도 정신을 일소하고, 목숨을 건 불량기자는 도태시키고, 그 면목과 내용을 전부 일신시켰음을 주지시키고 금일 이후의 동아일보는 엄중한 당국 감시 하에 발행을 계속 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동아일보 해정(解停)에 대하여

삼교(三橋) 경무국장 담(談)


동아일보는 오늘 그 발행정지처분을 해제하게 되었다. 동지의 요즘 불상사는 주지하는바 동사를 위요한 근본적으로 잘못된 지도정신에 원인이 있음으로 해서 그 비국민적 거조를 단호히 억압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당국으로서는 온건 공정한 언론은 충분히 이것을 존중 창달하게 함과 동시에 한편에 있어서는 적어도 반국가적 또는 반통치적인 편집방침 내지 언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취체를 가하여 이것이 절멸을 기약하는 것이 극히 긴요한 것임을 통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기회에 동아일보의 오랫동안의 잘못된 사상(謬想)을 시정하고 정당한 여론의 지도자로서 갱생시키는 것을 굳게 결의 하게 이르렀다.

이러한 까닭에 당국은 처분 후에 있어서 동사(同社)의 태도를 충분히 감시하여 동지(同紙)가 그 잘못을 회오하고 간부는 책임을 자각하여 죄를 천하에 사죄함으로서 일본 정신에 갱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유도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동사의 태도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여전히 그 아성을 고수하고 당면(當面)을 호도하려고 하므로 쉽게 당국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므로 금일에 이르러 혹 폐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사료되나, 이번 번연(飜然) 깨달은 바 있어 전 간부는 모두 인책 사임하고 새 사장 밑에 진용을 일신하여 종래의 전통을 청산할 일체의 내적 준비를 완료했다. 또한 자진하여 총독정치에 참여할 것을 맹서하고 특히 황실의 존중에 유의하고 국체의 명진, 국위의 선양, 불온사상의 배격에 노력함으로서 대 일본제국의 신문지로서의 참 사명을 다할 것을 서약하였음으로 이에 발행정지 처분을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동지는 금후 그 서약을 충실하게 준수하여 적어도 과오가 없을 것으로 기대하는바, 모름지기 사회의 목탁으로서 정도를 살펴 온건질실(穩健質實)한 논진(論陣)을 베풀어 신흥조선(新興朝鮮) 약진일본(躍進日本)을 위해서 일익적 임무를 수행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최준 교수는 ‘한국신문사’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석간이나 조간이 인쇄된 후 30분 동안은 실로 긴장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만일 ‘고치라와 경무국(警務局) 도서과(圖書課)데스. 기계(機械)오 도메테 구다사이’(여기는 경무국 도서과 입니다. 기계를 멈춰주시오) 이러한 전화가 걸려오면 일부 기사 삭제가 아니면 압수와 발매금지의 벼락이 내리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굴욕을 참고 어둠을 뚫고 올라와 오늘에 이른 신문입니다.


  일장기말소사건 당시 석간 사회면 편집기자로 강제해직 당한 장용서(張龍瑞) 선생은 ‘일장기말소사건의 후문(後聞)’, 동우(東友) 1966년 8월호에서 “진정한 뜻에서 민간지란 우리 ‘동아’ 뿐이었다. 그래서 일인관헌(日人官憲)에게 미움은 혼자 탔던 것이다. 이렇게 단독으로 민족 대변의 중임을 지고 나서니, 천신만고가 앞을 막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가시덤불을 걸어가던 본보의 그 기구한 운명도 기막혔지만, 여기에서 붓대를 잡고 민족혼을 깨우치던 동지들의 노심초사야말로 참말 눈물겨웠었다.”고 증언했습니다.






3

동아일보 1937년 6월 2일자 호외 1면







  今日 本報 解停


  금일 석간부터 발행


  작년 8월 27일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무기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은 본보는 이래 달로 열한달, 날로 279일간을 기다려오던 중 금일(6월 2일) 해정(解停)의 지령을 받고 금일 석간(6월 3일附)부터 발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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