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로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 관련 기자들을 쫓아내고 복직도 안 시켰다.’ 는 비난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 사건 이후 김성수가 한 것은 이에 관련된 10여 명의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이었다.”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년, 189~190쪽,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이 사건에서 동아일보사가 한 역할은 이길용 기자 등 관련자들을 해직시킨 것이 전부였다.” (정운현 당시 대한매일 특집기획팀 차장, ‘미디어 오늘’ 1999년 10월 28일자 특별기고 ‘동아여, 80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가’)
“동아일보사는 이길용 기자와 관련자들을 쫓아낸 뒤” (한겨레 2001년 3월 29일자 1면 기획연재 언론권력<2> 동아일보의 친일곡필 중 ‘손기정 일장기 말소’ 기자 쫓아내고, 친일 언론보국 서약)
“정작 당사자인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이 사건 직후 쫓겨났으며 해방 이후에도 동아일보에 복귀하지 못했다.” (정지환, ‘월간 말’ 2001년 4월호 163쪽, ‘황국신민’이 일본을 꾸짖는 이율배반, 연속 기획, 냉전세력을 말한다.① 일본역사교과서 왜곡과 조선 동아의 원죄)
“이길용 기자가 해방 뒤에도 동아일보에 복귀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손석춘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 25~26쪽, 2002년, 한겨레신문사)
이 같은 비난은 기본적인 기초 자료 조사도 하지 않고 하는 무책임한 주장입니다.
최승만(崔承萬) 당시 잡지부장은 이미 1985년에 발행한 ‘나의 회고록’ (인하대학교 출판부) 306~307쪽에서 아래와 같이 자신이 당한 일을 소상히 밝혀 놓았습니다.
“유치장에서 약 40일 지냈다. 중촌(中村) 도 경찰부장이 구속되었던 10명을 2층 회의실에 모아놓고 훈시를 한 후 서약서에 서명날인을 하라고 하였다.
(1)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못할 것,
(2) 시말서를 쓸 것,
(3) 만일에 또 다른 운동이 있을 때에는 이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 받을 것을 각오할 것.
이 3개 조항은 현진건(玄鎭健), 이길용(李吉用), 신낙균(申樂均), 서영호(徐永浩), 최승만(崔承萬) 5인에 한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써 구류되었던 10명은 석방되었다. 신동아 9월호는 압수되었고 6권 9호로서 폐간이 되었다.”
위의 기술처럼 현진건(玄鎭健), 이길용(李吉用), 신낙균(申樂均), 서영호(徐永浩), 최승만(崔承萬) 선생 등 5명은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못 한다.’는 서약서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서명날인을 하고 풀려날 수밖에 없는 암울하고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승만 선생은 위 글에서 뒤이어
“이번 일이 직접 책임자뿐만 아니라 동아일보사 사장 송진우(宋鎭禹) 씨를 비롯하여 부사장 장덕수(張德秀), 주필 김준연(金俊淵),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씨도 신문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진건 사회부장, 이길용 기자, 신낙균, 서영호 사진반원, 최승만 잡지부장 뿐 아니라 송진우 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도 일제의 강요로 쫓겨났고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장덕수 부사장까지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김준연 주필과 설의식 편집국장은 8월 28일자로,
현진건, 최승만,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장용서 석간 사회면 편집 기자는 9월 25일자로,
송진우 사장은 11월 11일자로,
박찬희 지방부장은 12월 3일자로,
이여성 조사부장은 12월 10일자로,
장덕수 부사장은 12월 20일자로 사직서를 내야 했습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은 소유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고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와 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시켰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 1937년 6월 11일자)
위와 같은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쫓아냈다는 말입니까?
이들이 형사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 형법에 ‘일본 국민이 외국에 대하여 모욕을 가할 목적으로 그 나라의 국기 기타 국장(國章)을 파괴, 제거, 또는 오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백원(圓) 이하의 벌금에 처하되 단 외국 정부의 청구를 기다려서 그 죄를 논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일본 국장(國章) 모욕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동아일보가 이들을 복직시키지도 않았다는 비난은 전혀 사실과 다른, 어처구니 없는 허위의 주장입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1일자로 동아일보가 중간(重刊)되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퇴직 당했던 사람들 중 희망하는 사람은 전원 복직시켰습니다.
이길용 기자는 사업부장으로, 백운선 사진반원은 사진부장으로 복직해 활동하다 두 분 다 6·25 때 납북됐습니다.
해방 후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선생과 함께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이길용 기자의 아들 이태영(21세기 스포츠포럼 공동대표)은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전쟁이란 공포, 그 자체이다. 살육과 파괴, 그 뒤에 남는 것은 절망과 폐허. 어디 땅위의 모습뿐이랴. 인간성의 파멸과 민족의 원한이 더 무섭다. 6·25전쟁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남겼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그 악몽 같은 기억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붉은 깃발만 보아도 떨리던 가슴은 지난 번 월드컵축구 열풍 속 ‘붉은 악마’와 ‘붉은 해일’을 보며 위안을 찾은 듯 다소 누그러진 상태다. 아무튼 6·25는 회상하고 싶지 않은 한(恨)의 숫자로 남아 있다. 나는 당시 세상눈을 뜨지 못한 10살 소년이었다. 전쟁이 터진지 사흘째 되던 날,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거니와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 성북동 골짜기에 포탄이 날아들고 집 안마당으로 ‘붉은 무리’들이 난데없이 닥쳐 들었다. 인민군이라는 이들은 불문곡직 아무 설명도 없이 아버지를 연행해갔다. 중학 5학년에 다니던 큰 형은 학보를 만들던 우익선봉이었다는 이유로 좌익 친구들에 끌려가 린치를 당하고 풀려났다. 그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 정신적 고통을 겪을 정도의 모진 고문이었다. 애국부인회 지역회장이었던 어머니는 역시 ‘반동’으로 분류되어 정치보위부에서 사흘 동안 취조를 받다가 구사일생 빠져 나왔다. 이러한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증오심으로 가슴에 맺혀있다. 나의 아버지 이길용 기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의 주역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다. 이 사건으로 신문사에서 해직 당했다가 광복 이후 현역에 복귀했지만 이미 기자직을 떠나 한국체육사를 집필하는 한편으로 한국민주당 조직부 차장으로 정계 투신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활동이 요시찰인물의 요인이 되었는지 모른다…(하략)…. ” (‘민족의 원한 언제나 풀리려나, 납북 언론인 생사확인운동에 기대하며’, 대한언론인회 홈페이지 2002년 12월 1일)
일장기말소사건으로 강제 퇴직 당했던 설의식 당시 편집국장은 1945년 12월 주간 및 편집인으로, 장덕수, 김준연은 1947년 2월 취체역으로 복직했습니다.
종로경찰서 서(西) 이방(二房)에 이길용 선생과 함께 갇혀 있었던 임병철(林炳哲) 당시 조간 사회면 편집 기자는 속간 후 복직, 강제 폐간 때(1940년 8월) 사회부장이었고 해방 후 중간되며 1945년 12월 다시 재입사, 1946년 4월 취체역 편집국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진건 당시 사회부장은 279일간의 최장기 무기정간 후 1937년 6월 2일자로 강제정간처분이 해제된 뒤 학예부장으로 복귀했고 전문 작가의 길로 나서며 1938년 7월 20일자 조간부터 1939년 2월 7일자까지 동아일보 4면에 소설 ‘무영탑’을 노수현(盧壽鉉) 화백의 그림과 함께 164회 연재했습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웠던 청전 이상범 화백은 동아일보가 속간된 이듬해인 1938년 1월 1일자 신년호 특집 1면에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렸습니다.
청전 이상범 선생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71년 이우경 화백이 동아일보 일장기말소 보도에 주도 역을 했던 청전 이상범(1972년 별세) 댁으로 문병 가서 나눈 대화가 있다.
‘선생님 어서 쾌차하셔서 일어나셔야지요.’
‘왜놈들에게 당한 것이 날씨만 흐리면 쑤시는 게 평생 따라다니더니 이젠 막장에 왔나봐. 갖은 악형을 행하는데, 나도 두 번이나 기절하다시피 했어. 장용서, 이길용, 서영호도 냉수를 너 댓 양동이 뒤집어쓰면서 격검대로 두들겨 맞고 놈들이 타고 올라앉아 짓누르고 이놈저놈의 발길에 채이고, 살아나온 게 용할 따름이지.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지네.’
‘인촌과 고하가 불같이 화내며 선생님들을 회사에서 쫓아냈다면서 친일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사람아, 그런 막말 하늘이 두렵지 않나. 천벌을 받지.’
‘일제 36년 치하에서 우리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매일매일 총독부와의 전쟁이었어. 독립운동 한답시고 분파지어 해외로 나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에 어찌 비할 수 있단 말인가. 인촌과 고하는 상해임시정부를 은밀하게 지원한 우국지사야. 만 국민 앞에 우리 조선의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한다니…. 인촌은 크게 탄식했었네. 이길용도 나도 두 분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일장기 말소를 결행할 수 있었던 거야. 총독부 왜경 놈들이 회사를 둘러싸고 폐간 압박을 해대니 겉으로야 화낼 수밖에.’
‘인촌은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며 위로까지 해주었다네. 퇴사 뒤에도 꼬박꼬박 월급을 보내주었어.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나중에 모두 복직시켰고.’
이런 사실은 나절로 우승규 선생에게도 들은 적이 있다고 이우경 화백(1998년 별세)은 필자에게 말해 주었다. (고정일, ‘책과 사람들-인물로 보는 한국출판100년사’, 책과 인생 2004년 12월호, 62쪽)
장용서 당시 사회면 편집자는 1939년 6월 경리부 사원으로 복직했으며 1940년 8월 10일 강제 폐간되며 자동 해직됐다 1945년 12월 복간되며 편집부 기자로 다시 동아일보에 돌아왔습니다.
최승만 잡지부장과 박찬희 지방부장은 언론계를 떠나 최승만 선생은 제주도지사, 인하공대학장을, 박찬희 지방부장은 참의원을 역임했으며 이여성 조사부장은 해방 후 월북했습니다.
‘민족지로 키워온 사람들’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좌담회, 신동아 1980년 4월호, 298~305쪽)
최승만(崔承萬 · 83, 중앙여중 재단이사 · 전 동아일보사 잡지부장)=일장기말소사건은 우리 언론 역사에 남을 일이었습니다. 이길용 씨와 이상범 씨가 주역이었는데 일제의 압박이 극심한 그때 이런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동아일보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정래동(丁來東 · 77, 전 성균관대 교수 · 전 동아일보사 서무과장)=나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는데 그때 고등계 주임인 일본인 형사가 그 사건의 주인공인 이길용 씨는 평소 자기가 볼 때 전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랬다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사회(최준<崔埈> · 67, 전 중앙대 정경대 교수 · 신문방송학)=한 가지 특기할말한 일은 정간을 당했는데도 사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서항석(徐恒錫 · 80, 예술원 회원 · 전 동아일보사 학예부장)=처음 석 달 동안은 전액을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석 달 동안은 반액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어 두 달인가를 못 주었어요. 그런데 사원들이 신문사는 우리가 지켜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매일 출근했어요.
당시 동아일보 분위기의 한 단면을 전해주는 당사자들의 회고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