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경영지식팀 신성미 기자의 ‘다시 가고 싶은 그곳’
만 스물여섯 살 생일날인 3월 21일 아침. 늦은 겨울휴가를 나 홀로 오스트리아 빈 행 비행기를 탔다.
8시간의 시차 덕분에 생일을 32시간이나 보낸 것은 기분 좋은 우연(serendipity)이었다.
아무도 날 기다리지 않는 그곳에서 온전히 혼자이고 싶었다. 당당하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빈 구시가를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트램을 탔다.
19세기 후반에 빈의 구시가를 에워쌌던 성벽이 헐리고 둥글게 4km 길이의 ‘링’(환상대로)이 만들어졌다. 링을 따라 공원, 국립오페라하우스, 미술관 등이 들어섰다.
한 바퀴 도는 데 30분 정도 걸리는 트램을 난 여러 번 탔다. 명소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력도 있지만, 내가 트램을 좋아했던 것은 셀린느와 제시 때문이었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생 남녀가 빈에서 하루 동안 사랑을 나누고 ‘쿨하게’ 헤어진다.
셀린느와 제시가 이 트램의 맨 뒤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랐다. 혼자인 내가 트램에서 에단 호크를 반의반이라도 닮은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린 것은 당연했다.
나는 셀린느와 제시의 또 다른 흔적을 찾아 ‘시민공원’으로 갔다. 둘이 와인 한 병을 외상으로 사마시며 노숙으로 하룻밤을 보냈던 곳이다.
벤치에 앉아 한가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데 호남형의 미국 남자가 말을 건다. 이 남자 역시 휴가를 내 여기까지 왔다는데, 내 영어발음 탓인지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10분 간 이어진 미남과의 수다도 내겐 사치였나. 두 눈 부릅뜬 그의 여자친구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허리가 내 목까지 올 정도로 늘씬한 게르만 미녀였다.
트램을 타고 빈 북쪽 교외의 하일리겐 슈타트로 향했다. 베토벤이 살았던 동네이기도 한 이곳에는 포도밭이 많다. 포도밭 주인들이 햇 화이트와인을 일컫는 ‘호이리게’를 파는 술집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호이리게는 맥주잔처럼 생긴 큰 잔에 가득 담겨 나왔다.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한 잔만 마셨는데도 술집을 나올 땐 바보처럼 실실 웃고 있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산꼭대기 종점까지 올라갔다. 아직 물이 찬 차가운 도나우 강과 빈 시내가 한눈에 잡힌다. 혼자인 나는 한없이 애틋하고 홀홀 자유로웠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낭만과 자유가 그리울 때면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빈에서의 추억을 회상한다. 언제쯤 다시 트램을 타볼 수 있을까. 그땐 내 옆에 누군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