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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22 : 일장기 말소사건의 진실과 왜곡(1)

Posted by 신이 On 8월 - 31 - 2009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를 폄훼하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일장기 말소는 이길용 등 기자들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둘째, 사건 후 경영진은 ‘몰지각한 소행’ ‘고루거각을 불태웠다’며 화를 냈고 

  셋째, 관련 기자들을 쫓아내고 복직도 안 시켰으며 

  넷째, 279일의 정간이 끝나고 1937년 6월 2일 속간호를 내면서 사고를 통해 친일 언론 서약을 했고 

  다섯째, 일장기 말소는 동아일보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했으며 그로 인해 폐간에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사실을 왜곡한 것입니다. 

 

  첫째, ‘일장기 말소는 이길용 등 기자들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회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반쪽만 맞는 말’입니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 조사에서 그렇게 밝혀졌으니까요.  


 “사지가 멀쩡한 나의 몸에 쇠사슬이 칭칭 얼기어 잔인한 고문의 지옥생활에 발버둥치던, 실로 몸서리치는 저 일장기말살사건… 손기정 군이 세계 마라손에서 1위의 영관(榮冠)을 획득하였을 때의 그의 보도 사진에 일장기를 말살(抹殺)하였다는 죄(?)로 당시 동아일보 간부들과 함께 구금되었을 때의 혹독한 고문 취조야말로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리는 공포감을 억제할 수가 없다. 내 나라 내 민족이 세계 제패를 하였다는 역사적 보도를 담당한 나의 의무가 어찌 크지 않으랴. 내 ‘카메라’생활 20년 가운데 이러한 악학(惡虐)한 쓰라린 경험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백운선 동아일보 사진부장, ‘사진반 기자 눈물의 기록’, ‘신문기자 수첩’, 서울 모던출판사, 1948년, 梅19쪽)


   

  “이 놈들이 우리를 취조하는데 처음에는 보통 하오 4시 이후 한사람씩 취조실에 불러내서 수족을 결박하여 벤치에 앉혀놓고 놈들이 미리부터 꾸며가진 취조 요지를 읽어가며 말소한 이유와 경로 또는 상층 간부가 지시한 것처럼 족닥거리는 것이었다. ‘이것 봐, 이 사건은 너의 사장, 주필, 편집국장들이 사전에 지시 명령한 것이지.’하면서 갖은 악형(惡刑)을 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원체 체약(體弱)해 보인 까닭인지 그 놈들에게 두 번 몹시 악형을 당한 뒤로는 큰 악형은 아니 받았으나 장용서 이길용 서영호 씨 등은 벌(罰) 물(냉수를 네다섯 바케츠 먹는 것이다)도 켜고 격검(擊劒)대로 맞기도 하고 그 놈들이 타고 올라앉아서 짓누르는 것도 당하고 이놈 저놈의 발길에 죽게 채이기도 하고 따귀 맞기, 귀 붙잡고 매미 돌리기 등 갖은 악형을 당하였다. 나를 다른 방 한 구석에 무엇인가 보이지 않게 가려놓더니 그 날 사진 원고를 가지고 조사부에 왔던 여 사동을 불러다 놓고 사건 전말을 묻는 것이었다. 이 아이도 처음에는 ‘나는 몰라요.’하고 얼마쯤 버티었으나 원체 놈들이 딱딱거리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견디다 못하여 이길용 씨가 조사부 나에게 사진을 보내던 얘기와 또 둘이서 전화로 말하던 얘기를 자초지종 일호(一毫) 착오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일이 이 쯤 된 바에야 나는 더 변명할 도리도 없고 이 이상 더 할 말조차 없어서 그저 어름어름해 버렸다. 이길용 씨는 그 소녀가 나간 뒤 얼마 아니 되어 비로소 잡히어왔는데 그 날은 우리들이 끌려온 후 3일째 되던 27일 정오경이었다.” (이상범의 회고, 동아일보 1956년 8월 19일자 4면) 

 


  지검비(地檢秘) 제1280호, 소화11(1936)년 8월 28일, 경성지법 검사정

  법무국장, 고등법원 검사장, 경성복심법원검사장 귀하

 

  동아일보 게재 손기정 사진에서의 국기 표장(表章) 말소에 관한 건

  위 제목의 건에 관해 경기도 경찰부장이 별지 사본과 같은 보고가 있음.

  법무국장 

  보고처 : 고등법원 검사장, 경성복심법원검사장

 

  경고검비(京高檢秘) 제1929호, 소화 11년 8월 27일, 경기도 경찰부장

  경무국장 귀하

  경성지방법원검사정 귀하

 

  동아일보 게재 손기정 사진에서의 국기 표장(表章) 말소에 관한 건

  동아일보사가 8월 24일 발행한 같은 달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제 5657호에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기에서 우 승한 손기정의 사진을 실으면서 경기복 흉부에 표출된 일본 국가를 표징하는 일장기를 고의로 말소함에 따라 신문지법에 의거 차압 처분했으며, 이 사진의 가공과 게재 경위에 대해 당부(當部)에서 상세하게 취조한바 그 진상은 다음과 같거니와 그 행위야 말로 오직 그들이 항상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적 의식에 따른 증오할만한 소위(所爲)임이 판명되었음. 이를 보고함.

 

  다 음

  一. 관계자의 본적 주소 성명 연령 등

  본적 경성부 명륜정 4정목 208번지

  주소 경성부 성북정

  동아일보사 운동부원(주임) 이 길 용

  당 37년

 

  본적 경성부 사직정 136번지

  주소 경성부 누하정 182번지

  동사 조사부원(화가) 이 상 범

  당 40년

 

  본적 경성부 팔판정 62번지의 2

  주소 경성부 통인정 31번지의 15

  동사 사진과장 신 낙 균

  당 38년

 

  본적 경성부 당주정 99번지

  주소 경성부 도렴정15번지

  동사 편집국 사회부원 장 용 서

  당 34년

 

  본적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내

  주소 경성부 사직정 173번지

  동사 사진부원 서 영 호

  당 28년

 

  본적 함흥부 풍서리

  주소 경성부 계동정 99번지의 2

  동사 편집부원 임 병 철

  당 31년

 

  본적 경성부 합정 150번지

  주소 경성부 아현정125번지

  동사 사진부원 백 운 선

  당 26년

 

  二. 사진게재 경위와 말소 사실

  운동부 기자 이길용은 8월 23일 오후 5시경 동아일보사가 같은 달 25, 26, 27의 3일 동안에 걸쳐 경성 부민관에서 독자 우대를 위한 ‘올림픽’ 활동사진을 상연한다는 계획 발표기사를 게재하고 그 다음으로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기로 하고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오려내어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 선수의 사진을 24일 석간에 게재할 예정이니 ‘그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를 보까시(ボカシ)(불선명)하게 수정해 달라.’고 명하자 이는 이를 승낙하여 오사카아사히지에서 오려낸 원화에 착색한 다음 이를 동사 사진과장 신낙균의 책상위에 제출했음. 그런데 편집국 사회부 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반경 사진부실로 들어와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부원 서영호가 함께 있는 곳에서 서에게 이상범이 보까시한 것만으로는 아직 일장기가 남아 있으니 충분하게 이를 말소할 것을 잊지 말라고 다짐하고 그 방을 나왔음. 서영호는 이를 승낙하고 동판에 나타난 손의 사진에서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 부분에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증거품 영치했음)하여 이를 말소하고 인쇄부에 넘겨 이것이 그 석간에 게재된 것임.

 

  三. 일장기말소에 대한 의사목적

  이길용 및 장용서 등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 동아일보지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조선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기사 편집은 이를 삼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장기를 그 사진에 표출하는 것은 조선 민족인 독자가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내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는 것을 헤아려 알고 이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임.

 

  四. 기타 참고사항

  임병철과 백운선은 공모하여 당초 당부의 취조에 대해 백운선은 ‘일장기를 말소한 것은 약품 사용을 잘못한 결과’라고 허위 진술을 했으나 당부의 추궁에 의해 전기 5명이 사건 관계자임이 판명되었음. 사법처분에 대해서는 목하 검사(귀)국과 협의 중임.

 

  동아일보 손기정 사진 게재경위 일람표

  O 운동부기자(주임) 이길용(37년)=23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사진 휴대하고 손의 사진 흉부의 일장기를 희미하게 하라고 명함→조사부원(화가) 이상범(40년)=승낙하고 백색을 칠함→사진과장 신낙균(38)=장용서의 요구를 서영호와 같은 방에서 청취함


  O 편집국사회부기자 장용서(34)=24일 오후 2시 30분 이상범이 희미하게 한 것이 아직 불충분하므로 말소해버리라고 명함→사진부원 서영호(28)=승낙 합의하고 청산가리 액을 사용하여 말소함

 

  참고

  O 편집부원 임병철(31년)=백(白)에게 사진에 대한 지식이 없어 과실로 약품을 잘못 써 선명하게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라고 서(徐)를 대신하여 진술할 것을 교사함→사진부원 백운선 (26년)=경찰부원에게 이와 같이 진술함


 

 

  경고검비(京高檢秘) 제2344호. 소화11년 8월 29일, 경기도 경찰부장

  경무국장 귀하

  경성지방법원검사정 귀하

  각도 경찰부장 귀하

  관하(官下) 각 경찰서장 귀하

 

  동아일보 발행 정지에 관한 건

  관하 경성부 광화문통 소재 동아일보사 8월 24일 발행의 동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제 2판 제 5657호 지상에 게재한 백림 올림픽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고의로 말소한 형적이 있어 이 신문지를 그날 신문지법에 의거 차압처분 했는바 본건은 그 정신에 있어서 가장 증오해야 할 행위로서 특히 국체명징(國體明徵)을 외치고 있는 오늘날 사안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경무국과 협의하여 다음날인 25일 동사의 관계자 수명을 당부에 호출하여 그 사진의 가공 및 게재의 경위에 관해 엄중하게 취조한바 그 진상은 다음과 같으나 그 행위야말로 오로지 그들이 항상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는 민족적 의식에 의거한 계획적 불령행위임이 판명되었으며 이 신문지는 치안을 방해한 것으로 인정되어 신문지법 제 21조에 의해 8월 27일 무기발행정지의 행정처분에 처해졌음. 이를 보고함.

 

  다 음

  一. 관계자의 본적 주소 직업 성명 연령 

  (위와 동일해 생략)

 

  二. 동아일보사의 경영 내용 및 최근의 논조 경향

  東亞日報는 대정9(1920)년 1월 6일 설립 인가가 난 것으로 최초에는 자본금 50만원의 주식회사였으나 그 후 자본금을 70만원으로 증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선내(鮮內)에서 발행하는 언문신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음. 이와 동시에 인가된 언문지로는 조선일보가 있고 또한 명치39(1906)년에 설립 인가된 매일신보가 있으나 전자는 설립 당시의 기초가 빈약하여 도저히 동아일보에 필적하지 못하며 또한 매일신보는 이른바 당국의 어용신문이어서 일반 조선인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음. 그 동안 혼자 동아일보는 풍부한 자금, 유력한 후원자와 일반 조선인의 의식에 영합하는 교묘한 민족 심리의 선동적 논조에 의해 선내(鮮內)의 언문 신문계를 리드하여 소위 동아일보 독점시대를 현출(顯出)하기에 이르렀음. 한편 수년 전부터 동업 조선일보는 자본금의 증액과 함께 사옥의 신축, 교묘한 선전에 의한 독자 흡수책 등으로 점차 그 지반을 확장하고 있으나 오랜 동안 일반 조선인의 마음속 깊이 파고 든 동아일보의 지반을 쉽게 침식하지 못해 동아일보는 여전히 제1위의 발행부수(55,000 내지 60,000)를 갖고 있으며 선 내외 각지에 5백5십여 개의 지(분)국을 설치하고 있음. 현재 이 신문 본사의 종업원은 영업국 32명, 편집국 46명, 공장직공 77명, 용인(傭人) 43명, 직영 지국원 14명, 계 312명과 간부 4명, 객원 7명이며 이 밖에 배달 53명이 있음. 이들 종업원의 대우는 경성부내의 신문사 중 상위에 속하며 1개월 인건비로 약 1만5천원을 요하지만 경영에는 상당히 여유가 있는 듯 아주 최근에 수만 원을 들여(동아일보사측은 10만원이 들었다고 말하나 7만원 정도인 것 같음) 고속도 윤전기를 구입하고 다시 사옥을 증축하기 위해 현 사옥 인접지를 3만5천원에 매수하는 등 사업의 비약적 확장을 계획하고 있음. 동아일보는 주의주장을 「조선민족의 생존권을 주장 옹호하는 데에 둔다」하여 언문신문 가운데 가장 민족주의적 색채를 선명히 하여 창립 당시부터 이러한 논조가 대단히 과격해지는 일이 있어 여러 번 차압처분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개전의 정이 없어 설립 후 만 1년이 채 되지 않은 대정9(1920)년 9월 신문지법 제 21조에 의해 안녕질서를 방해한 것으로 하여 발행정지의 행정처분을 받았으며 이어 대정15(1926)년 3월과 다시 소화5(1930)년 4월을 전후하여 3회에 걸쳐 발행정지처분을 받았음. 만주사변을 게기로 일본 국력에 대한 재인식은 일반 조선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고 이에 따라 언문지의 논조도 점차 그 필봉을 새롭게 하고 있음을 인정할만한 점이 있음. 그러나 원래 언문지는 민족적 풍자 기사를 게재하는 것이 2천만 조선 민중의 배경을 갖고 있는 특수 신문의 생명이라고 자임하고 있는 실정임으로 일반 조선인의 마음속에 흐르는 민족적 편견을 모두 해소하지 않는 한 논조의 온건화는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될 것이며 지금도 여러 번 시사 문제 등에 대한 민족적 풍자 기사 혹은 사상사건 등을 침소봉대 보도하여 일반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앙양을 꾀하고 있으며 특히 금년 2월 제도(帝都)에서 발발한 소위 2·26사건 이후의 언문지 논조는 엄중 주의를 요하는 경향이 있는 바 동아일보의 소화10(1925)년과 11(1926)년 1월부터 8월에 이르는 사이에 치안방해에 의한 기사 차압과 삭제 상황을 대비하면 소화10년 차압 1건, 삭제 21건에 비해 올 11년에 차압 9건, 삭제 18건의 다수에 달하고 있는 것은 그 동안의 사정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지난 번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동경사건과 같은 불상사의 발발 또는 국제 분쟁 내지 국교 단절 등의 사단(事端)이 발생하면 곧 바로 그 독특한 날카로운 필봉을 드러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바 이의 취체에 대해서는 특단의 주의를 요함.

 

  三. 취조 상황

  (1) 사진 게재 경위와 말소사실

  8월 25일자 동아일보 석간 제2판 제5647호 지상에 게재한 백림올림픽대회의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고의로 말소한 형적이 있어 이 신문지는 그날 차압처분 했으나 본건은 그 근본 사상에 있어서 가장 증오해야 할 행위로서 사안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경무국과 협의하여 그날 오후 7시 30분 경찰부 검열계 주임 경부를 동아일보사에 보내 관계자에 대해 당시의 상황을 취조한 바 본 사진은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게재된 마라톤선수 손기정 사진을 복사하여 전재한 것으로 사진기술자 백운선이 기술상의 과실로 일장기와 머리 부분에 보통보다 다량의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한 까닭에 해당 부분이 불선명하게 되었다고 진술했으나 그의 진술이 몹시 애매하여 사진 원지와 아연판을 증거품으로 영치하고 다음 25일 앞의 백운선을 당부에 호출하여 엄중 취조한 바 처음에는 전날 밤의 진술을 반복할 뿐 쉽게 진상을 진술하지 않았으나 극력 추구한 결과 자신은 그 사진 게재에는 하등 관계가 없고 우연히 8월 24일 밤 경찰부원이 동아일보사에 출두했을 때 현장에 있었던 편집부원 임병철이 백운선에게 사진 기술이 뛰어나지 못해 자신이 손기정의 사진을 작성할 때 과실로 청산가리를 다량 사용하여 불선명하게 되었다고 진술하라고 교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허위 진술을 한 것으로 이 사진 작성에 관해서는 이길용 외 여러 명의 관계자가 있으며 사진 기술상으로 볼 때 고의로 하지 않으면 일장기 부분만이 그와 같이 불선명하게 되지 않는다고 진술했음. 한편 25일 아침 일찍 당부에서도 사진기술자에게 압수한 원지와 아연판의 감정을 명한바 본 사진은 고의로 일장기 부분을 말소한 것에 하등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얻음에 따라 바로 운동부기자 이길용 외 5명의 관계자를 호출하여 엄중 취조한바

  이길용은 8월 23일 오후 5시경 동아일보사가 동월 25, 26, 27일의 3일 동안에 걸쳐 경성 부민관에서 독자 우대를 위한 ‘올림픽’ 활동사진을 상영하는 계획발표기사를 게재하고 그 다음 난에 마라톤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게재하기로 하고 8월 23일자 오사카아사히신문에 실린 손의 사진을 오려내어 조사부원 이상범에게 손선수의 사진을 24일 석간에 게재할 예정이니 ‘그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를 보까시(불선명)하게 수정해 달라’고 명하자 이는 이를 승낙하고 대판조일지에서 오려낸 원화에 착색한 다음 이를 동사 사진과장 신낙균 에게 제출했음.

  그런데 편집국 사회부기자 장용서가 24일 오후 2시반경 사진부실로 들어와 사진과장 신낙균과 동 부원 서영호가 함께 있는 곳에서 서에게 이상범이 보까시한 것만으로는 아직 일장기가 남아 있으니 이를 충분히 말소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다짐하고 그 곳을 나왔음. 이를 승낙한 서영호는 아연판에 나타난 孫의 사진에서 가슴에 표출된 일장기 부분에 다량의 청산가리 농액을 사용하여(증거품 영치해 두었음) 이를 말소하고 바로 인쇄부에 넘겨 이것이 그 석간에 게재되었음이 판명되었음.

 

  (2) 일장기말소에 대한 의사목적

  일장기 말소에 대한 의사목적에 관해 이길용, 장용서, 서영호 등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 동아일보지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창간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조선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기사 편집은 이를 삼가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장기를 그 사진에 표출하는 것은 조선 민중인 독자가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사내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있는 것을 헤아려 알고 이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임. 또한 이번 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이 세계 기록을 깨고 우승한 사실에 대해 그들은 손기정이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민족의 대표자로서 올림픽에 출장하여 우승했다고 세계에 발표하지 못하고 일본이 우승했다고 발표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우리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개탄을 금하기 어려운 일로서 우리 사에서도 대다수의 사원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진술했음.

 

  四. 사건의 조치

  상황은 이상과 같이 판명되어 관계자 이길용 외 6명은 계속 당부에서 구속 취조 중인바 이의 조치에 관해서는 소관 검사국과 협의하여 결정될 것이나 한편 본부(本府) 당국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판명됨에 따라 본 신문지가 치안을 방해한 것으로 판단하고 무기발행정지의 행정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8월 27일 오후 5시 이의 지령을 발령함에 따라 본도(本道)는 바로 동아일보 편집 겸 발행인 송진우를 당부에 호출하여 동 5시27분 경찰부장실에서 지령서를 교부하고 이의 수령서를 받았음. 한편 관하 각 경찰서에 대해 바로 이 사실을 전화 통달하고 특히 본사 소관 경찰서에서는 감독자 이하 4명의 서원을 동아일보사에 파견해 발행정지를 집행하고 당시 발송 도중(철도, 자동차, 우편 등)에 있던 것과 반포 중이던 신문지 대부분을 차압함.

 

  五. 발행정지 처분 후의 신문사 동정

  동아일보사장 송진우는 8월 27일 오후 5시 27분 본도 경찰부장에게서 발행정지지령을 접수하자 바로 회사에 돌아 와 자동차를 전세 내어 배달을 감독하여 당시 경성부내에 반포 중이던 신문지(석간 제2판) 회수에 애썼으며 또한 남아 있던 사원 이하 종업원 일동을 모이게 하여 무기정간처분을 받은 사실을 발표하고 사원들에게 근신하여 특히 언동에 충분한 주의하여 아직도 불근신하고 있는 것 같은 언동이 없도록 주의하고 잔무를 조속히 정리하라고 지시했음. 각 사원은 의외의 사태에 놀라 일부 사원 중에는 망연자실한 것 같이 보이는 사람조차 있었으나 각자 자신의 분담사무 정리에 착수했고 특히 지방 지국을 담당하고 있는 판매부는 선내 각 직관 지국에는 전화로, 기타 지 분국 판매소에는 각기 전보로 발행정지사실을 알렸음. 오후 6시 조선일보 편집국장 김형원, 주필 서춘 두 명이 위문 차 내사한 것을 비롯하여 서정희, 주요한 및 회사 중역인 김성수, 장현식, 김용무 기타 친교자 등의 방문을 받고 사장은 오후 8시 5분 김용무, 김성수와 함께 퇴사했으며 사원들도 이를 전후하여 퇴사했음. 그 사이 불온한 언동 등을 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시종 평정했음. 


 

  일장기말소의 최초 제안자이고 주역인 이길용 선생은 일제 경찰로부터 어떤 고초를 받았을까요?

 

  “저희 바깥양반은 몸집이 작아 몸무게는 45, 6kg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몸은 달리 튼튼해서 그 때까지 병 한번 걸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도 종로서의 고문으로 완전히 몸이 상해버렸습니다. 유치는 40일 동안 계속됐고 그 사이 면회는 한번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물품을 들여보내는 차입뿐이었죠. 그리고 차입하면 그것과 교체해서 입었던 옷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었으니까 속옷과 와이셔츠를 여러 차례 들여보냈죠. 그러면 나오는 와이셔츠는 언제나 피투성이 였습니다.” <이길용 선생의 부인 정희선(鄭禧善), ‘겨레와 함께 뛰었다 손기정, 그 힘찬 발걸음 – 베를린올림픽 제패 60주년 기념집’, 한국체육인동우회, 이길용기념사업회, 1996년 6월> 

  

  ‘두고두고 또 죽어도 있지 못할 중대사’를  이길용 선생은 1948년 ‘세기적 승리와 민족적 울분의 충격 소위 일장기말살사건’<‘신문기자 수첩’, 1948년, 모던출판사, 매(梅) 3-9쪽>에서 처음으로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112
‘신문기자 수첩’에 실린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의 수기

  “일장기 말살사건! 이 가닥을 잡으려니 저 가닥부터 써진다. 내가 운동 기사를 신문에 쓰기는 기미년 사건으로 2년 동안 있던 서대문 감옥을 나온 1921년 여름부터이니 그 이전의 운동 기사라고는 신문도 단 하나 매일신보가 있을 뿐이었고 운동 기사도 우리끼리는 행사다운 것이 없다가 을미년 후로 조선체육회란 커다란 존재가 탄생된 이래 전국적 행사가 활기를 띄우면서부터니 모두가 27년 전부터의 일이다.

 

  이 동안 3년간 조선일보로 동아의 대부대가 넘어갈 무렵 내 역시 도매금에 묻어갔다고 할까? 좌우간 화동서 수표교로 넘어가 있다가 1927년 9월에 다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로 돌아와 있기를 10년 되는 1936년 여름의 일이다. 달은 8월이요 날은 9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 말살사건’의 몸서리 쳐지는 기념할 역사의 날이다.

 

  예까지 이르는 동안 나의 머리에 뚜렷이 남아있는 사건은 을축년 수해 영남 낙동강의 탁류 출장사건, 이 해 정읍의 마(魔)의 교주 차천자(車天子) 면담사건, 1925년 이른 봄 전남 해남의 ‘엠에이틴’ 주사(注射)사건의 경계망 돌파 3일간, 1932년 내 약혼 중이던 이른 봄 경기 장호원에서 충북 장호원으로 강원도 문막으로 또다시 경기 오산에서 일약 충남 아산으로, 이렇게 신출귀몰하게 홀왕홀래(忽往忽來)하는 권총사건의 주인공을 따라 풍찬야숙 반삭(半朔 · 반달) 이윽고 포위경계망은 아산 온양에 있건만 조치원에서 체포된 힌트를 잡은 내가 선착(先着)으로 달려가 사건을 중대시 했던 만큼 그 밤으로 공주(당시 충남 경찰부 소재지)로 경찰부장 자동차에 호송하는데 범인 동승(同乘) 80리 사건, 이 해 가을 바로 9월 1일 제10회 세계올림픽이 미국 라부(羅府 · LA)에서 마치고난 뒤 일본의 국빈으로 동경을 들러 조선을 거쳐 가는 국제올림픽 위원회 위원 슈미트박사 초청강연 사건, 1933년 11월 중순 영하 30도의 동만소(東滿蘇) 국경으로 차(此) 소위(所謂) 만주사변 당시 15일간 끌려 다니며 사선을 돌파한 사건 등 얼른 손꼽아 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두고두고 또 죽어도 있지 못할 중대사는 아까 말한 1936년 백림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 그것이다. 사건이라기보다는 어마어마한 일대 사변이니 동아일보란 크나큰 기관의 문이 닫혀졌고, 날마다 중압 속에서일망정 왜정의 그 눈초리를 받아가면서도 조석으로 그렇게도 우렁차게 활기 있게 돌던 윤전기가 시름없이 멈춰 녹슬고 있으며 사진반의 백운선, 그리고 사진부의 서영호, 당시 사회면 편집자 장용서, 고(故) 임병철, 사진부장 신낙균, 화백 이상범 제 동지가 차례차례로 경기도 경찰부에 피검되고 이날 하오부터는 애궂은 비조차 퍼 붇는 석양에 마지막으로 내가 잡혀갔으며 그 익일에는 당시 사회부장인 고(故) 현진건 형이 잡혀 들어왔고 그 후로 신문에 실었던 동판을 그대로 신동아지에 실었다고 해서 당시 동지(同誌)의 편집 책임자 최승만 형과 동지(同誌) 사진반 송덕수씨까지 잡혀 들어오니 단 여섯 방 밖에 없는 경찰부 유치장은 대거 10명의 사우로서 난데없는 매의 합숙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 어찌 끔찍끔찍한 일대 변사(變事)가 아니랴.

  방의 배치는 가운데를 턱 막아 놓고 서(西) 일방(一房)에 현진건(玄鎭健), 서(西) 이방(二房)에 필자와 임병철(林炳哲), 서(西) 삼방(一房)에 서영호(徐永浩), 동 일방(東 一房)에 백운선(白雲善) 신낙균(申樂均), 동 이방(東 二房)에에는 이상범(李象範) 최승만(崔承萬) 송덕수( 宋德洙), 동 삼방(東 三房)에는 장용서(張龍瑞) – 이러하다.

 

  감격의 1936년 8월 9일! 서울시간으로는 8월 10일 하오 11시! 당시 조선체육회 간부 김규면(金圭冕) 씨 외 수인(數人)과 손 선수의 모교 양정중학의 안종원(安鍾元) 교장, 고(故) 서봉훈(徐鳳勳) 부교장, YMCA 체육부 당시 간부 장권(張權), 고려육상 경기연맹 이사 최재환(崔在煥), 제10회 세계올림픽 마라톤 선수 김은배(金恩培), 동(同) 권투선수 황을수(黃乙秀) 등 제씨가 백림스타디움으로부터 현장중계방송의 전파를 들으러 동아일보 사장실에 모여 있었다. 궁금 또 초조 속에 밤은 각각(刻刻)으로 깊어간다. 때마침 전년까지 독일 백림에 체류하여 올림픽과 더욱이 마라톤 코스에 익숙한 안철영(安哲永) 씨가 합석하여 일실(一室)의 탁상에는 백림의 마라톤 코스 도면이 놓여있어 흥미를 글자 그대로 완연(宛然) 현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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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 본사 앞에서 손 선수의 소식을 기다리는 시민들.



  이윽고 전파다. 때는 자정도 지난 새벽 한시 반이다. 일착일착(一着一着) 거듭 부르더니 손기정 선수가 선착! 타임은 2시간 29분 19초 2. 그나마 세계 올림픽 신기록! 또 둘째가 영국의 노장 하파-타임은 2시간 31분 23초 2! 그리고 셋째가 우리의 남승룡 선수다. 타임은 2시간 31분 42초. 전파의 그 뒤를 더 들을 겨를도 없고 필요도 없다. 한편은 호외요 한편은 메가폰으로 확성 가두선전(街頭宣傳) 속보다. 내 일신을 둘로 셋으로 쪼개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순간의 감격은 비단 동아 사장실의 일당(一堂) 만이 아니다. 사전(社前)에 야심(夜深)한 3경(三庚)이건만 운집한 대군중 모두가 전파 일성에 환희 일색이요, 함성 환호 뿐 이다. 우주의 기쁨이요 감격이며 인류 승리의 만세다. 목이 터지게 외치는 ‘손기정 만세!’ 성(聲)은 기미년 독립 만세 성(聲)에 방불한 바 있었다. 1925년의 6 ·10 만세와 1929년의 11·3 광주 학생사건의 만세와는 류(類)다른, 초월한 그야말로 만세 일색이었다. 그것은 6 ·10 만세나 광주학생사건의 만세는 목 놓아 맘 펴놓고 부르지 못한 왜경의 눈을 피한 만세성(萬歲聲) 이었다면 이번 마라톤 승리의 만세성(萬歲聲)은 암만 목 높이 불러도 잡아갈 놈 없는 왜정에 이른바 합법적 만세 이었기 때문이다.

 

  첫째한 손 선수가 수립한 신기록과 둘째 영국 선수와의 차는 124초 이오, 남 선수의 셋째 기록은 영(英) 선수보다 단 18초 8의 차이니 말하자면 둘째 못지않은 남군의 기록에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거듭 기쁨이다.  


  여기서 우리의 흥분은 단군의 거룩한 한줄기 피를 우리 맥박 어느 혈관, 어느 한 낱의 세포에 까지라도 그대로 숨어있는 한민족 본래의 본연으로 되돌아가는 민족혼에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이끌려 지고 말았다.

 

  마치도 제 아무리 불효나 부덕한 자라도 심히 기쁘거나 아주 괴로울 때 그 극에 달하면 ‘아이고 어머니’ 나 ‘아이고 하느님’을 부르게 되는 심경 그대로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물의도 구구하였던 소위 ‘일장기 말살사건’이란 이러한 흥분과 민족적 감격에서 빚어진 것이다. 누구 하나의 기술의 과실도 아니요, 또 착오도 아니다. 짐짓 일을 벌려 물의를 자아내려는 기도도 아니다. 심산(心算)도 아니다. 제 각기의 비판도 평론도 제멋대로 이지만 인사 받기도 심히 괴로웠던 ‘일장기 말살사건’이란 대체의 윤곽이 이러하다.

 

  이것이 송두리 채 숨어있기를 10년! 해방되어 가지고 영문으로는 미 주둔군 보도진을 통해서 씌어졌지만 이처럼 자세히 쓰여 지기는 내 알기에는 자기 자신이 관여한 일이라, 이것이 처음 되는 자술(自述)이다. 머리가 지긋지긋 하던 그 당시의 묵은 기억을 일깨우니 감개가 자못 무량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내 집 뒤주 밑바닥에 깔아 감추었던 옛날의 태극기를 성북 산촌의 내 초가 대문에 올릴 때 감격도 감격이려니와 그해 9월 7일 미군이 진군하면서부터 익(翌) 8월 하오 4점(點)을 금(線)잡아 36년 동안 이 강산에서 고혈을 빨아먹던 총독부 간판을 떼쳐 내고 이 시각부터 일장기는 땅에 떨어지며 그 자리, 경복궁 옛터에 기(旗)발도 찬연한 태극의 옛 국기가 오랜만에 풍년든 이 강산, 이 가을바람에 나부낄 때, 이 순간의 필자는 자신의 얼도 넋도 분별할 수 없는 무아몽중(無我夢中)이다. 감분(感奮)의 극적 장면이었다.

 

  뭐니 뭐니 하는 ‘일장기 말살사건’의 이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모두가 인사(人事)다. 1936년 당시의 인사와는 성질이 아주 확 변한 인사다. 그 순간에 뉘 못지않게 나의 감회, 자못 가슴을 찌르고 흥분의 눈물이 옷깃을 적시 운다. 인사 받기가 싫어서 인파의 속을 피하였다. 같지 않은 자들의 인사가 더욱 나의 맘을 괴롭히는 한편 공연히 의분(義憤)의 두 주먹이 쥐어졌기 때문이다.

 

  일장기란 내 집 대문에 달아본 적이 없었다. 달건 아니 달건 눈에 잘 띄지 않는 산골 숨은 집인 때문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사건 후로는 아니 달수는 없었다.

 

  은거 10년! 기(旗) 달라는 날 빼놓지 않고 달았건만 1941년과 1944년 두 차례나 서대문 감옥에 사로잡힌 몸이 되었으니 도대체 기 달고 안 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창씨(創氏)를 못했고 학병 권유를 해야 할 동리(洞里)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차마 권해보지 못했다. 다만 소위 장행회(壯行會) 식사에는 ‘저들 우리 겨레의 유위(有爲)한 청장년들이 조선(祖先)의 죄가(罪價)로 산(生) 재물이 되거니-’ 할 때 울며 보냈을 뿐이다. 전지(戰地)에서 ‘견사각오(犬死覺悟)’란 편지도 왔었지만 나는 답 한 장 한일이 없다. 뭐라고 하랴!

 

  동아(東亞) 지상(紙上)에 내 자신이 태극기를 지우고 실린 사건이 한 번 있었다. 이러고 보니 ‘태극기 말살사건’이 있었단 말이다. 193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10회 세계 올림픽대회에 출장한 조선의 아들, 세 선수 (김은배, 권태하, 황을수)를 그곳 미국 체육 관계자와 교민 동포들이 환영회를 성대히 하였는데 그 장면 사진을 동아지(東亞紙)에 게재했던 일이다. 정면 벽에는 우(右)에 미국 성조기와 좌(左)에 태극기가 꼭 같은 광장(廣長)으로 크게 걸려 있고 그 앞에 우리 세 선수 또 그 좌우에는 그 당시 중국 올림픽진 대표의 신국권(申國權) 씨<현 중앙청 외무처장 대리 신기준(申基俊) 씨> 미국 체육 관계자들 역역(歷歷)한 제씨 이었다. 실기는 실어야겠는데 태극기야 그대로 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태극기만 짓자니 한편에 무엇을 지운 자리가 있을 것으로 눈치를 경무국 도서과 패에게 뵈었다가는 그것도 딱한 일이라 모진 시어머니 눈치 피하는 격이었지만 좌우간 미국기까지 두 기(旗)를 모두 지워서 인물 본위의 사진을 실은 일이 있다.

 

  이번에는 그와 반대다. 동아지(東亞紙)가 태극기를 짖기는 한 번 이지만 일장기 말살이란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미어진 것만 알고 있다. 무리(無理)도 아니다. 사내(社內)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심이었던 것이다.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경향 간에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얼른 말하자면 지방면으로는 면소(面所)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짓고 실리기는 부지기수다.

 

  이러한 우리로서 어찌 손기정 선수 유니폼에 일부러 그려 넣은 듯한 (전송 사진으로서는 너무 일장마크가 선명하였다 = 문제의 사진은 오사카아사히 전송 소재) 일장 마크를 그대로 실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월계수 화분을 들고 촬영한 손 선수 인물로는 처음인지라 넣고 싶은 욕심에 그것을 오려서 화백 이상범 형(당시 동아 근무) 에게 좀 더 수정을 하되 일장 마크를 아니 보이도록 부근을 흐려 버리라고 필자가 부탁을 하였다.

 

  그 당시의 감분(感奮)과 환희가 부지불식간에 조선 민족혼의 본연으로 돌아갔고 무엇 하나 겁 없는 승리의 환열(歡悅)이 조선 이 땅의 청년에게 큰, 새로운, 빛나는 힘을 부어준데 도시(都是)가 도취되었던 것이다. 운동기자 생활 16년! 이처럼 흥분되고 기꺼운 때가 또 언제 있었으랴. 이러든 나는 이 나라의 아들인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유니폼 일장마크에서 엄숙하게도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괄세를 하고 ‘요보 시오가나이’(믿을 수 없다는 뜻) 라든 자들이 저희가 세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24년 전 마라톤으로부터 내리 마라톤에는 꼭 승리한다고 버티고 덤비다가 달(達)치 못한 숙망(宿望)을 우리 손 선수가 우승을 하고 나니 그제부터는 그다지도 낯간지럽게 ‘이십여 년의 숙망(宿望) 달성! 아등(我等)의 손 선수 당당 우승!’ 이러한 제목이 일문 각지(日文 各紙)에 대서특필하는 꼴을 볼 때 어찌 민족적 충격과 의분(義憤)이 없겠는가.

 

  갖은 차별과 온갖 천대를 알뜰히 다 하고 나서 우승하고 나니 덤비는 양은 민족적 의분은 그만두고라도 인류의 양심으로서 가증키 짝이 없었다.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빚어진 일장기 말살사건이란 뉘 노도(怒濤)를 막을 자- 없음과 같다고 할까. 저- 해내(海內)의 우리는 개선(凱旋)의 날을 손꼽고 목을 놓아 기다리고 있을 지음 그해 8월 25일 부(附) 24일 석간 사회면에 실린 사진으로 – 그 저녁 신문은 압수를 당하니 압수쯤은 항다반(恒茶飯)이었지만 이 저녁 압수만은 서두는 품이 벌써 심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익 25일은 아침부터 서두에 말한 차례로 잡혀 들어가니 도합 10명, 그들의 고문은 사(社)의 방침이 그러하지 않느냐는 둥, 고인된 고하(古下) 송 사장이 시킨 것이 아니냐는 둥, 김준연 주필이 그렇게 시키지 않았느냐는 둥, 그러면 네 혼자의 의사이었느냐에 집주(集注)해서 고문은 연일연발(連日連發)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사회면에 실린 탓으로 당시 사회부장 고(故) 현진건 형으로 끝났고 운동의 책임자로 이것을 시켰다는 것으로 필자에게서 그치고 마니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 말살사건이다.

 

  손기정 선수가 가지고 온 당시의 월계수는 군(君)의 모교 양정 뜰에서 잘 자라 이층 창까지 커있으니 길이길이 자라는 월계 나무와 함께 이 나라 마라톤 왕국의 철옹성은 두고두고 더욱 빗나며 찬연(燦然)한 마라톤 탑(塔)이 이 나라와, 이 나라 젊은 아들들과 더불어 한 층(層), 한 층(層), 또 한 층(層) 무장무장 오르기를 빌며 특히 이 사건의 동지 중에 고인된 현진건, 임병철 두 동지의 명복을 삼가 빈다.  1947년 11월 5일<성북 산제(山齊)에서> <필자, 동아일보 사업국 차장, 전 동사(同社) 운동부장> 

 

  그런 기자들이 동아일보에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동아일보의 자랑입니다.

 

  이길용 선생은 “동아지(東亞紙)가 태극기를 짖기는 한 번 이지만 일장기 말살이란 항다반(恒茶飯)으로 부지기수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미어진 것만 알고 있다. 무리(無理)도 아니다. 사내(社內)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실지 않을 속심이었던 것이다.” 고 당시 동아일보사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의 전통이 그러했습니다.


24

1936년 8월 10일자 호외 1면



  

  둘째, 사건 후 경영진은 ‘몰지각한 소행’  ‘고루거각을 불태웠다.’며 화를 냈다고 비난합니다.  

 

  “흔히 동아일보가 ‘민족지’ 운운하면서 단골로 내세우는 메뉴가 1936년에 발생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우선 이 사건은 동아일보사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체육부 이길용 기자 개인의 애국심에서 비롯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순간의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오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인촌 김성수전’)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인촌의 태도는 이랬다. 또 당시 사장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주인공 이길용 기자를 사장실에 불러놓고 크게 꾸짖었다. 당시 총독부와 밀월관계에 있던 동아일보에 이런 불경스런 사태가 발생했으니 두 사람이 펄펄 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따라서 이 사건을 동아일보의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사건 이후 김성수가 한 것은 이에 관련된 10여 명의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이었다.”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189~190쪽) 


 

  그러나 ‘인촌 김성수전’ 388~389쪽의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보전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점점 험악해져가는 시국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해도 무기정간이 내릴 것은 틀림없었다. 제2, 3차 무기정간 처분의 이유가 되었던 외국인의 메시지나 축사의 비(比)가 아니었다. 제1차 무기정간을 가져온 ‘삼종신기(三種神器)’도 간접으로 그것을 건드렸던 것이고, 또 시대가 그 때와 달랐다. 몇 달 전 동경에서 이른바 황도파(皇道派) 장교들이 내대신(內大臣) ‘사이또오(齊藤實)’ 장상(藏相) ‘다까하시(高橋是淸)’ 등 중신(重臣)을 살해한 소위 2·26사건 때도 그들이 내세운 구호가 국체명징(國體明徵)이었고, 국기는 그 단체의 상징인 것이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순간의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오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 산란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던 인촌은 도중에 문제의 신문을 구해서 그 사진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민족의 정기가 위축되어만 가고 변절하는 유명, 무명의 군상이 늘어나는 세태로 볼 때 히노마루의 말소는 잠자려는 민족의식을 흔들어 놓은 경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에 대한 탄압은 민족 대표지로서 쾌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신문사에 도착하니 밖에는 수많은 정, 사복 경관이 지켜 섰고 사내는 마치 독립만세를 부르고 난 것 같은 흥분에 쌓여 있었다. 사장실에 들어선 인촌은 눈을 감고 심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고하에게 한마디 없을 수 없었다.

“자네 거기서 뭘 하고 앉아 있나?”

 그러나 고하는 딴 소리를 했다

“지금쯤 남차랑(南次郞)이는 부산에 도착했을 걸….”

 이때 신임 총독 미나미(南次郞)는 부임 도중에 있었다. 이 미나미는 그 뒤 6년 동안 조선총독에 재임하면서 조선민족 말살정책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제2의 데라우찌(寺內正毅)’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인물이었다.

 


  고하는 이렇게 계속했다.

 “부임해 오는 미나미 총독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군벌은 미친 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그도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면서 흥분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인촌은 더 할 말이 없었다. 


 


  26일 경성에 부임해 온 총독 미나미는 29일자로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습니다.


   ‘인촌 김성수전’의 글은 ‘일장기말소사건’을 처음 보고받은 당시(1936년) 경영진의 복잡하고 불안한 생각과 심경의 변화를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1976년) 후학들이 그린 것으로, 그 글의 핵심과 결론은 기자들의 충정을 이해하고  ‘민족지로서 쾌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 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남의 글을 인용하며 전체의 의미, 그 맥락은 보지 않고 거두절미하여 몇몇 글귀만을 발췌해 의도적으로 비난하는, 정당하지 못한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5 Comments »

  1.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결국은 다 짤라 버린 것은 맞는데 뭘…
    후학들이 미화시킨 거지.

    Comment by 강가의산 — 2009/09/24 @ 11:10 오전

  2. 동아미디어그룹의 공식블로그 ‘동네’를 운영하고 있는 ‘신이’입니다.
    동네까지 찾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해 계속 글을 싣고 있으니 꾸준히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사료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
    비판을 하시기 앞서 저희의 글을 끝까지 찬찬히 읽어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네에 계속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Comment by 신이 — 2009/10/06 @ 5:16 오후

  3. 손바닥으로 어떻게 하늘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손바닥으로 자기 눈을 가려 하늘을 보지 못하는 우매한 생각과 판단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Comment by 세브첸코 — 2010/04/25 @ 11:22 오후

  4. 강가의 산// ㅋㅋㅋ후학이 아니라 당시 기록이 다 남아있는데 너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랔ㅋㅋㅋ좌파 운동권들이야 말로 후대에 왜곡해서 비하하는거짘ㅋㅋ

    Comment by ㅇㅇ — 2021/01/04 @ 2:52 오후

  5. 세브첸코// 너도 마찬가짘ㅋㅋㅋ당대 기록이 다 있는데 그걸 외면하고 왜곡시키는건 니들같은 운동권들이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

    Comment by ㅇㅇ — 2021/01/04 @ 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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