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초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는 김형원, 유광렬, 이서구 선생 등 3명이었고 사회부장은 이상협 창간 편집국장이 정리부장과 함께 겸했습니다.
석송 김형원(石松 金炯元 · 1900~1950 납북, 재직기간 1920.4~1924.5)은 유일한 한글신문이었던 매일신보의 독자문예란에 자주 시(詩)를 투고한 것이 계기가 돼 1919년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이듬해 동아일보가 창간되며 매일신보 연파주임(軟派主任 · 사회면 책임자)을 지냈던 이상협 창간 편집국장이 유광렬과 함께 불러 왔습니다.
김형원은 1920년 8월 이상협의 뒤를 이어 약관 20세에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됐습니다.
그는 30년을 언론계에 몸담았으나 평기자는 1919년 여름 매일신보 입사로부터 1920년 7월까지 1년밖에 하지 않아 수습을 마치고 바로 부장 기자가 된 셈입니다.
“나이는 필자보다 두 살 아래였으나 신문기자로서는 항상 앞서가고 있었다. 매일신보에 있을 때 정안립(鄭安立)이라는 정객이 ‘만주에 고려국(高麗國)을 건설한다’는 꿈을 안고 회합한데 다녀와서 두 칼럼에 걸치는 긴 기사를 순식간에 써내는 것을 보고 그의 문재(文才)를 부러워 한 일도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나이가 가장 어리면서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이상협 씨의 눈에 들어 가장 먼저 사회부장이 됐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333쪽)
김형원은 당시 내노라 하는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1919년 매일신보에 ‘사나히냐?’라는 시를 ‘석송생(石松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이후 1925년까지 열정적인 시작(詩作)과 번역, 평론활동을 폈습니다. 주로 개벽(開闢) 잡지에 많은 시를 발표했는데 1920년부터 1924년까지 75편이 실렸습니다. 특히 개벽 1922년 7월호에 미국의 민중시인 휘트먼을 소개하여 ‘조선의 휘트먼’이라고 불렸습니다.
그의 시는 동아일보에도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1920년 4월 2일자 5면
‘민중의 공복(公僕)’
東亞日報 – 나는
배달의 혼(魂)과 인류(人類)의 몸에
20세기 문명(文明)을 입은
당신네 – 민중의 종이올시다.
가장 참되고 정성스러운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가장 어리석고 헤아림 없는
모든 사물(事物)을 관찰할 눈도 없는
시비를 판단할 지력(智力)도 없는
오직 당신네의
참된 부르짖음을
정성껏 들을 두 귀를 가졌고
당신네의 선(善)을 선전할
불같은 혀를 가졌고
민중의 도덕을 초(草)할
검(劍) 같은 붓대를 가진
東亞日報 – 민중의 충복(忠僕)
나임을 알으십시오.
(하략)
“석송 김형원 씨는 안창남(安昌男) 군 후원으로 뒤숭숭해진 동아일보의 편집실에서, 모여 들어온 3면 기사의 원고를 고르기가 바쁜데 가슴을 헤쳐 보면 손바닥만한 고약이 2매나 붙어있다. 극도의 신경통으로, 머리와 가슴이 아프기 경쟁을 기 쓰고 하는데 쉬지도 못하고 철필(鐵筆)과 씨름하는 시인의 설움이 어떠랴, 고약 냄새나는 시가 보고 싶다.”<문단풍문(文壇風聞), 개벽 1923년 1월호, 43~44쪽>
그는 1923년에는 좌익 문인단체인 ‘파스큘라’에 가담하기도 했고 1929년 발표한 민요풍의 시 ‘그리운 강남’은 안기영(安基永 · 월북 작곡가)이 곡을 붙여 일제강점기에 널리 불렸습니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김형원은 1923년 5월부터 1년간 동아일보 동경특파원을 지낸 뒤 1924년 5월 ‘자기를 알아 준’ 이상협을 따라 유광렬과 함께 조선일보로 옮겼습니다. 이후 시대일보, 중외일보, 다시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당시의 신문사는 다 한번씩 들어갔다 나와 ‘방랑 기자’라는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엄정히 말하자면 씨의 본직은 시가(詩歌)가 아니요 기자라는 것이 옳을 것이외다.…신문이 없어서 못 돌아난 관(觀)이 있다 싶으니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신문 방랑’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누구를 붙잡고 할 것이겠습니까. 그의 삼십 몇 살이라는 세월은 실로 신문사 밥으로 닳아진 것이라 하여도 조금도 과언이 아니요, 씨 자신도 인정할 것이외다.…이점에서 필자는 문사로의 씨보다도 기자로의 씨의 앞길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문사기자측면관(文士記者側面觀)’, 동광 1931년 10월호>
그러나 8·15 후 공보처 차장으로 간 것이 빌미가 돼 6·25 때 납북됐습니다.
“6·25 때 납치된 사정을 부산 피난 중에 그의 지친(至親)에게서 들은 것은 다음과 같다. 공보처 차장이라 하여 한번 공산군에게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왔는데 그 지친이 ‘형님, 아무래도 그놈(공산군)들이 끝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우리 집으로 피신하라’고 권하였더니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얘, 그랬다가 너까지 화를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 죽든지 살든지 내가 당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 있다가 납치된 것이다. 이것을 제삼자의 눈으로는 ‘양심이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탄식하는 이도 있으나 역시 피신하는 것이 옳았을는지 모른다. 평소에 말하는 것으로 보아 연애로 결혼한 그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도 많이 있고 또 애처가로서 자기가 피신하면 가족들이 고생할 것을 염려했음인 듯하다.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하여 술이 취하면 여흥으로 장타령을 하는 것을 보았고… .” <유광렬, ‘기자반세기 – 재기(才氣)에 찬 소장 언론인 – 김형원’, 서문당, 1969, 334~335쪽>
북한에서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출판사 교정원으로 있다 1956년 함경남도 안주탄광으로 쫒겨난 뒤 행적이 끊겼다는 설이 있습니다.
1930년 4월 1일자 부록 5면 반혈(半頁 · 반 페이지 ) 호외(號外) 조선(朝鮮) 최초(最初) 기록(記錄)
“호떡을 먹고 냉수를 마시면서 창간호를 낸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려. 나는 지금도 황토마루를 지낼 때마다 3층 양옥이 번듯이 선 것을 볼 때는 저 집을 지은 벽돌 한장 한장에 우리네의 피와 땀이 엉기었느니라고 생각이 됩니다.…그동안에 대사건으로는 48인 사건을 위시하여 대소의 정치적 공판을 겪은 것은 물론이오 미국의원단 일행이 내방하였을 때라든가 손병희(孫秉熙) 씨가 서거할 때 같은 때에는 신문사 편집국에 앉아있는 우리도 마치 전장(戰場)에 나간 것 같이 긴장한 공기 중에 지냈습니다. 그 중에도 손 씨가 작고할 때에는 삼일삼야를 내가 쭉 상춘원(常春園)에 가서 살았습니다. 손 씨는 5월 19일 오전 3시에 별세하였는데 신문사에서는 반 페이지 짜리 양면 인쇄(半頁大兩面刷)의 사진까지 넣은 호외를 5시에 발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마 조선문 신문에서는 큰 호외를 가장 민속 (敏速)하고 완전히 발행한 최초의 기록인 줄로 생각합니다.”(창간 초 본보 사회부 기자이던 김형원 중외일보 편집장 술회담)
“내가 석송을 처음으로 만나본 것은 꽤 인상적인 것이다. 나는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졸업시험을 보지도 못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었는데 그 이듬해인가 여럿이 모여 선생님들을 모시고 사은회나 하자해서 명월관에서 모임을 가졌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어떤 젊고 젊은 친구 하나가 잔뜩 취해서 우리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 언동이 그야말로 방약무인이고 선생님들도 쩔쩔매는 것 같이 보였다. 한참 떠들고 술 마시고 돌아간 후에 그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가 석송이라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사 사회부장인 석송은 우리 학교 선배이기 때문에 우리 사은회석에 찾아온 것이라는 것이다. 석송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는 것이다. 나이가 나보다 한살 위인데 석송은 대신문사의 사회부장이고 나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유명한 석송을 그 후로는 만날 기회도 없이 지내다가…석송이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대 하루아침 일찌기 방 사장 댁에 방문을 갔었다 한다. 종이봉지에 무엇을 들고 들어오는 석송을 보자 방 사장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저희 집에서 오늘 아침에 깐 병아리가 하두 예뻐서 사장님께 드리려고 가져 왔습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석송의 처세술의 일 단면을 보여준 것으로서 석송이 일생을 통하여 이런 일이 많았던 것을 부인치 못할 것 같다.” (이건혁, ‘인물론 – 석송 김형원’, 신문평론 1976년 1월호)
일본말 ‘도꾸다네(とくだね)’를 ‘특종’기사라고 하기 보다는 ‘독점’기사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해석을 하기도 했던 김형원의 아호(雅號) ‘석송(石松)’은 ‘돌 위에 올라 선 솔’이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