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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9 : 창간 얼굴들 4 – 진학문 선생

Posted by 신이 On 5월 - 26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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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이색 부음 광고가 실렸습니다.




  부고는 죽은 순성 진학문(瞬星 秦學文 · 1894~1974) 선생이 미리 써놓은 것이고 사망 날짜는 친구 최승만 선생이 나중에 써넣은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寵愛(총애)를 받았아옵고, 또 적지 아니한 弊(폐)를 끼쳤읍니다. 感謝(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安寧(안녕)히 계십시요.’

  1974년 2월 3일

  진학문(秦學文)




  ‘故人(고인)의 뜻에 따라 火葬(화장)으로 하고 여러분의 念慮(염려)하여주신 덕택으로 모든 일을 무사히 끝마쳤음을 衷心(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74년 2월 7일

  未亡人(미망인) 秦壽美

  友  人(우인)   崔承萬




  부고를 스스로 써놓고 죽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람, 진학문은 그만큼 특이한 생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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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 진학문







  게이오(慶應)대학 보통부(1907년)와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1913년), 동경외국어학교 러시아과(191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유학을 했으나 모두 중도하차(中途下車)했습니다. 그가 평소 ‘형님’으로 부르던 최남선의 주선으로 경성일보 기자가 됐지만 조선인의 차별에 분노, 얼마 후 사직했습니다.


  동경으로 돌아간 그는 당시 조선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진 요시노(吉野作造)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신문사에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추천으로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 기자가 돼 경성특파원으로 부임, 조선인 최초의 총독부 출입기자가 됐습니다.




  총독부 출입기자였기 때문에 3·1독립운동 후 조선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하려는 총독부의 낌새를 일찍 알게 돼 이상협, 장덕준과 함께 ‘민족지’ 발간에 뜻을 같이 하고 동아일보의  창간멤버가 됐습니다. 창간 후 그는 정경 · 학예부장을 맡았으나 그의 가장 큰 업무는 ‘툭하면 당하는 압수다, 삭제다 하는 불상사(不祥事)에 대한 항의와 무마’였다고 합니다.




  그는 동아일보도 6개월 만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본 정치인(山道洋一)을 만나 일제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을 일본 형사가 숨어서 엿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만주벌판을 떠돌다 1927년 한국인 최초의 브라질 이민자 중 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 곳에서 외동 딸(5살)을 열병으로 잃고 1년 만에 돌아와 별다른 일없이 지내다  총독부 출입기자 때 알았던 총독부 고위 관리의 권유로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내무행정 책임자)이 됐습니다. 이 일로 그는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1백만 명에 이르는 재만(在滿)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대변자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인이 개간한 황무지를 일인(日人)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등 그는 그 시대 재만 동포들의 크나큰 희망이었고 마음의 지주였다.” (김을한, 인물론 – 진학문, 신문평론 1976년 8월호)




  그는 1920년 2월 동경에서 일본 여자(宮崎壽美)를 만나


  첫째 한국인이 될 것 (결혼 후 한국 이름 진수미(秦壽美)로 바꿈)


  둘째 절대로 복종할 것


  셋째 가난한 것을 참고 견딜 것 등 세 가지 조건을 붙여서 결혼, 80 평생을 해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또 동경 유학 중이던 1916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를 동료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만나 ‘새 생활을 추구하는 조선 청년들을 위한 시 한편을 써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이듬해 최남선이 하던 잡지 ‘청춘’(1917년 11월호)에 ‘패자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실어 타고르를 조선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패자의 노래 




  주께서 날다려 하시는 말슴


  외따른 길가에 홀로 서 있어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라시다.


  대개 그는 남모르게 우리 님께서


  짝 삼고자 구하시는 신부일세니라.


  검은 낲가림(面紗)으로 가리었는데


  가슴에 찬 구슬이 불빛과 같이


  캄캄한 어둔 밤에 빛이 나도다.


  낮(晝)이 그를 버리매 하나님께서


  밤을 차지하시고 기다리시니


  등이란 등에는 불이 켜졌고


  꽃이란 꽃에는 이슬이 매쳤네.


  고개를 숙이고 잠잠할 적에


  두고 떠난 정다운 집 가으로서


  바람 곁에 통곡하는 소리 들리네.


  그러나 별들은 그를 향하여


  영원한 사랑의 노래 부르니


  괴롭고 부끄러워 낯 붉히도다.


  고요한 동방의 문 열리며


  오라고 부르는 소리 들리니


  만날 일 생각하매 마음이 조려


  어둡던 그 가슴이 자조 뛰도다.






  The Song Of the Defeated




  MY Master has asked of me to stand at the roadside of retreat and sing the song of the Defeated,


  For she is the bride whom He woos in secret.


  She has put on the dark veil, hiding her face from the crowd, the jewel glowing in her breast in the dark.


  She is forsaken of the day, and God’s night is waiting for her with its lamps lighted and flowers wet with dew.


  She is silent with her eyes downcast ; she has left her home behind her, from where comes the wailing in the wind.


  But the stars are singing the lovesong of the eternal to her whose face is sweet with shame and suffering.


  The door has been opened in the lonely chamber, the call has come; And the heart of the darkness throbs with awe of the expectant tryst.




 

  “일제에 정복되어 ‘패자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지만… 이제 얼마 안가서… 승리의 날을 생각하매 어둡던 가슴이 기쁨으로 뛰도다. 대개 이런 뜻의 상징적인 노래를 통해 타고르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었다.” (조용만, ‘경성야화’, 도서출판 창, 1992년, 357~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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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와 함께 한 진학문(맨 왼쪽이 진학문)







  “신문인이란 흔히 ‘루즈’한 사람이 많건만 선생의 성격은 호방하면서도 지극히 섬세하여…그 같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도 결코 예의와 인사를 잊지 않았으니 나는 오늘날까지 그 분만큼 인간미가 풍부하고 겸허한 사람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김을한, 인물론 – 진학문, 신문평론 1976년 8월호)






  “내가 동아일보에서 일했던 것이 지금부터 43년 전, 그것도 별로 오래지도 않은 기간이었지만, 지금도 그때 일들이 내 옛날이야기의 많은 몫을 차지한다…




  몇몇 유수한 분들이 독립운동사건에 걸려 옥고를 치르느라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없었지만 그때 동아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없이 전국에서 골라 뽑은 준재(俊才)들이오, 또 우국(憂國)의 뜻을 지닌 지사(志士)들이었다.




  특히 우리 편집국 진용은 간부, 평기자 할 것 없이 모두들 엇비슷한 젊은 나이로서 상하의 구별 없이 한 타령으로 지낼만한 처지였다. 그런데 특히 각 부장 등 간부직을 고루 나누지 않고 몇 사람이 겸직을 했던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이유가 있었다.




  동아가 창간되던 해에는 마침 기미만세사건의 바로 그 이듬해여서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옥중에 있었고 특히 그중에는 앞으로 언론계에서 대활약이 기대되는 많은 인재가 있었다.




  명실 공히 한민족의 대변기관과 민족 지성의 집결체임을 자임하고 나선 동아일보는 이들 옥중 인사들을 받아들인다는 예견 하에 그들의 자리를 쉽게 마련해 주기 위해 한 사람에게 한 부를 맡기지 않고 2부 이상씩을 맡겨 장래 옥중 인사들이 풀려나올 경우 그들에게 한 부씩을 덜어 맡기기로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우리가 함께 일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인사들은 육당 최남선 선생을 비롯, 고하 송진우, 현상윤 등 제씨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동아는 이렇듯 쟁쟁한 인재들을 망라해 놓긴 했지만 그땐 아직 우리나라에 언론의 꽃이 피기 전이어서 경험 있는 사람이 부족한데다 겹쳐 닥치는 수난 때문에 신문 경영과 제작은 실로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동아는 민족진영의 유일한 대변지라는 점에서 민족으로부터의 애호(愛護)와 신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고 그 영향력 또한 절대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동아의 사원들이 그의 직장을 단순한 생계의 방편으로 안 것이 아니고, 일종의 민족계몽운동 내지는 독립운동 전열에 나서고 있다는 자부와 정열을 가졌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내외의 수난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들 동아에 모였던 젊은이들은 조금도 의기(意氣)를 꺾임이 없이 용감하게 그의 소신을 폈고 오히려 수난이 닥칠 때마다, 그 결속이 더 굳어지고 뜻을 굳혔었다.” <진학문, ‘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9월호 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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