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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사장으로는 박영효(朴泳孝 · 1861~1939년) 선생을 모셨습니다.

  신문 발행의 허가가 용이치 않고 발행 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귀족의 작(爵)을 가졌던 사람이지만 옛날에 개화운동에 관계했고, 민족정신도 있고, 총독부에서도 호락호락하게 보지 못할 사람이어서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창간 당시 중앙학교장 최두선의 증언)




  그러나 박영효 초대 사장은 두 달 만에 사장직을 떠났습니다.




  1920년 5월 4일자부터 6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 부로(父老)에게 고함’과 5월 8, 9일의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으로 생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설은 유교문화의 폐해를 지적한 내용인데 유림(儒林)에서 반발, 불매운동까지 벌이려 하자 박영효 사장은 사과문을 싣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사원회의를 열어 토의한 결과 사과문 게재에 뜻을 모으지 못하자 “사장으로서 사(社)를 통제치 못하고 지위만 지키고 있을 수 없다.”며 사장직을 사임했습니다.




  이광수의 기술처럼 그는 ‘조선근세사에 두둑한 이름 중 하나’였고 중추원 부의장 후작 박영효라고만 보고 싶지는 아니한, 그의 뒤에는 그의 전반생(前半生)의 젊은 박영효가 살아 있었습니다. <갑신정변 회고담, 박영효 – 이광수 대담, 동광(東光) 1931년 3월호, 13~16쪽>




  그는 12살이던 고종 9년(1872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遠)의 친손자인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의 천거로 철종의 무남독녀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했으나 불행히도 결혼한 지 석 달이 안 돼 사별했습니다. 당시 관행상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는 공식적으로는 재혼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개화파의 기수, 갑신정변의 주역이 됐고 최초의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창간 10주년 기념식에서 “창립 당시로 말하면 조선 안에서 조선말로써 발행하는 신문은 매일신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동아일보가 창간되니 전 조선의 인기가 자연히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창기라 모든 것이 곤란하여 사장석에 앉은 나로서도 동아일보의 운명이 며칠 동안이나 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동아일보가 벌써 창립 10주년을 맞게 되고, 동시에 기초가 공고하여진 것을 볼 때 나 개인으로서는 물론이요 전 조선 사람들이 기뻐서 경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술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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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초대 사장



 


                        

  창간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 · 1893~1957)은 ‘신문의 귀재’ 였습니다.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관립한성법어학교(官立漢城法語學校)를 거쳐 일본의 게이오(慶應)대학에 2년여 수학한 뒤 19세에 매일신보에 입사, 21세에 연파주임(軟派主任·한글전용 사회면 책임자), 25세에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신문 제작에 뛰어난 소질과 기량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의 편집, 영업, 공장의 일까지 소상하게 아는 사람은 이상협이 유일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3·1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3월 7일자에야 3면에 ‘各地騷擾事件(각지소요사건)’이라는 2단 제목으로 보도할 수밖에 없었던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의 한계를 절감, 얼마 후 사직하고 최남선의 구속(3·1독립선언서 작성)으로 주인이 없던 신문관(新文館)의 일을 돌봐주다 동아일보 창간에 깊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창간 후 그는 ‘횡설수설’ 최초의 고정필자로 필명을 날렸고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편집국장이면서도 직접 현지로 달려가 르포기사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일본 본토 광고를 개척, 신문 수익 증가에 큰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몽(何夢·이상협)은 처음 보면 대리석 위에 냉수를 붓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차차 알수록 그 대리석에는 온기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며 그 흐르는 물에는 단맛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때인가 주석(酒席)에서 태형 폐지 힐문(詰問)시의 추회(追懷·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그리워함)를 하며 하몽의 쌀쌀한 것을 이야기했더니 그때 하몽은 웃으며 ‘내가 그렇게 굴지 않았더라면 신문기자 꼴이 박히기나 했겠느냐’며 웃었다.” <창간 기자 이서구, 별건곤(別乾坤) 1928년 2월호>




  1924년 4월 ‘박춘금 사건’으로 송진우 사장과의 불화가 깊어져 조선일보로 옮겨 간 뒤, 조선일보의 성격을 ‘민중의 신문’으로 규정하고 ‘혁신 조선일보’를 처음 외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년 남짓 조선일보에 있으며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조·석간 발행, 부인견학단 모집, 최초의 여기자(최은희) 채용, 변장 기자 탐방, 만화 ‘멍텅구리’ 연재, 무선전화 공개방송 등을 기획한 것으로 언론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1926년 중외일보의 창간에 참여하면서는 ‘가장 값싼 신문’을 만들겠다며 구독료를 인하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사람들’(77~81쪽)은 “그의 손을 거지치 않은 신문이 없을 정도로 이상협은 언론계를 풍미했다. 동아일보사 창간의 주역이었고 조선일보를 혁신시킨 주인공이었으며 민간신문인 중외일보를 창간하고 매일신보 부사장을 역임했다. 신문의 편집과 경영에 관한 한 당대 최고였으며 언론계에선 드물게 자신의 인맥까지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봉춘(再逢春)’, ‘눈물’ 등의 신소설을 쓰고 ‘몬테그리스트 백작’을 ‘해왕성(海王星)’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문학청년이기도 했습니다.




이상협 창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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