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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 5 : 청년신문, 동아일보의 기개

Posted by 신이 On 4월 - 27 - 2009

  창간 당시 동아일보는 ‘청년신문’이었습니다.




  주간 장덕수가 25세, 편집국장 이상협이 27세, 논설반 기자 겸 정치부장 진학문이 26세, 논설반 기자 장덕준(28), 김명식(29)은 20대 후반이었으며 평기자 가운데 김정진(32) 만이 서른이 넘었고, 염상섭(23) 한기악(22) 유광렬(21) 이서구(21) 김형원(20) 등이 모두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도 29세였습니다.




  기자들은 대개 추천으로 입사했지만 몇 명은 입사 시험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한결같이 준재(俊才)들로 이미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치고 있던 쟁쟁한 유명 인사들이었습니다. 국외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이도 있고,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겪은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유근 양기탁 선생 등 각 방면의 지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창간호를 내게 되어, 한 개의 신문기관이라기 보다는 다른 의미가 컸고 그 기개가 천지를 휩쓸 것 같았습니다.” (창간 기자 한기악)




  “전 사원이 항상 긴장하고도 감격한 가운데서 힘을 다하여 해가 지고 날이 밝도록 일하였습니다.” (창간 기자 유광렬)




  “동아일보에 들어온 사람은 신문기자를 하나의 직업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남들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나는 편안히 앉아서 문필보국(文筆報國)을 한다. 이것을 가지고 뭐가 괴로우냐.’ 이런 심리를 가졌습니다.” (창간 기자 김동성)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주로 대학생이던 배달청년들은 ‘동아일보’라는 글씨가 선명한 파란색 옷을 입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골목골목을 누볐습니다. 이 신문을 얻어 보려고 골목이 미어질 정도였고 ‘동아일보’라는 외침과 방울소리가 뒤섞여 신명 나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일제 경관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이 광경을 흘겨보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평기자의 보수는 나이, 경력에 차등을 두지 않고 모두 60원(쌀 한 가마니 값이 6,7원). 그러나 월급을 가지고 많다 적다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간을 당했을 때 월급을 받지 못해 몇 달씩 집에 끼니가 없이 지낸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모두가 이를 흔쾌히 감내했습니다.




  “그 때 여관에서 여섯 달인가 일곱 달 밥값을 못 내고 있었어요. 나중에 신문사에서 월급을 주기에 한꺼번에 갖다 주었어요. 그랬더니 주인 여자가 ‘당신네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자 생활을 하는 것이나 우리가 여관을 하면서 기자의 밥을 먹여주는 것이나 같은 일인데 밥값을 주니 받기는 받겠지만 대단히 미안하구려.’라고 하더군요.” (유광렬)




  정간, 판매금지, 압수가 반복되면서 월급은 커녕, 배달료도 주지 못해 신문이나 호외를 찍어놓고 못 돌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고 나가자.”

  기자들은 호외 한 뭉치씩을 들고 종로 거리로 뛰쳐나가기도 했습니다.




  “기자들이 호외를 돌린다며 시민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호외를 가가호호 떨어뜨리고 돌아가니 편집국 어른들이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문간까지 나와 젊은 기자들의 어깨를 어루만져줄 때 우리는 모두들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창간 기자 이서구)




  장기 정간 때, 기자들은 무시로 신문사에 드나들었지만 서로 연락할 길이 없어 ‘새드름’이라는 사내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아침에 신문 용지 한 폭에 줄을 긋고 제호를 달아 놓으면 기자들이 오가면서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소식을 빼곡히 써 넣었습니다.  




  어느덧 ‘새드름’에는 사설란이 생기고 사회면, 정치면도 생겼습니다.




  어느 날 ‘유근 선생이 유광렬 군과 밥내기 장기를 두고 졌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사주지 않는 것은 대단히 불가하다’는 공격적인(?) 사설이 실려 그런 글을 쓰면 ‘새드름’도 정간시킨다는 ‘경고문’이 나붙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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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당시 편집국의 청년 기자들. 오른쪽 첫 번째가 월봉 한기악(月峰 韓基岳)



 


 


  아! 동아일보야


  月 峰 生




  民衆(민중)의 벗으로 東亞細亞(동아세아)에

  半萬年(반만년) 燦爛(찬란)한 우리 歷史(역사)와

  三千里(삼천리) 華麗(화려)한 우리 江山(강산)을

  위하고 위해서 네가 나왔지


  죽은 것 살리고 언 것 녹이려

  潛伏(잠복)된 一切(일체)를 發興(발흥)케 하려

  壓挫(압좌)된 온 것을 蘇生(소생)케 하려

  障碍(장애)와 試驗(시험)을 掛念(괘념)치 말고


  너를 고대한지 이미 오래고

  너에게 바람이 많고 컸도다

  네 使命(사명) 重(중)함은 누구나 알고

  네 主義(주의) 바름은 누구나 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2일자 8면ec82aceca7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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