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2일자 1면 제호
‘東亞日報’라는 제호(題號)는 창간 당시 편집감독 석농 유근(石儂 柳瑾) 선생이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동아세아(東亞細亞)’ ‘해 뜨는 곳’ 의 중심이 되자는 뜻입니다.
1920년 4월 2일자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이어지고 있는 ‘東亞日報’라는 제자(題字)는 당대의 명필,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이 썼습니다.
1920년 4월 1일자 ‘東亞日報 創刊號’라는 글씨와 그 주변의 도안은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화백이 만든 것입니다. 도안은 강서대묘 벽화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창간호의 디자인은 창간 약 보름 전에 편집회의에서 당시 미술 담당 기자이던 고희동에게 맡겨졌다. 광교에서 좀 떨어져 있던 김진국(金鎭國)의 사랑방에서 제자와 도안이 완성되었다. 우리나라 서예 화가의 모임인 서화협회의 사무실이었던 이 사랑방에서는 김돈희(金敦熙) 협회장과 이상범(李象範) 노심산(盧心汕) 등이 자리를 함께하여 의논에 의논을 거듭, 십여 일이나 걸려 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용틀’이라고 하는 창간호의 도안 ‘신선과 용’은 강서 고분벽화에서 착상을 한 것이다. 이 도안의 구도와 제자를 초안하는데 일주일 남짓 걸렸고 고희동이 붓을 들어 이를 완성하는데 사흘 동안 꼬박 정성을 쏟았다. ‘용틀’의 모습은 상서로운 힘의 웅비를 상징하는 것. 창간호 다음날부터는 김돈희 서화협회장의 휘호에 고희동이 다시 도안을 그려 넣은 것으로 쓰게 됐는데 도안은 그 뒤 여러 차례 바뀌기도 했다. 다만 그 제자만은 그대로 살려져 동아의 ‘얼굴’로서 겨레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삼년에는 이상범이 제호 도안을 개작, 한반도와 무궁화 바탕을 그려 넣은 것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8년 뒤에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다시 바뀌어졌다. 총독부는 이 도안의 내용이 잃어버린 나라와 나라꽃을 담아 은연중에 항일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킨다고 개작토록 강요한 것이다. 이 도안은 1945년 12월 속간과 더불어 부활되었다.”(1970년 4월 1일자 22면,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유근 선생은 창간호 1면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 에서 “동아일보야, 너의 부담 무겁도다. 너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이다. 그의 사상, 그의 희망, 그의 목표, 그의 심리, 일일이 보도하여 그로 하여금 능히 기립(起立)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발전케 하며 그로 하여금 능히 비약케 함은 믿노니 너를” 이라며 민족지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국어학자요, 국사학자인 애류 권덕규(崖溜 權悳奎) 선생은 창간호 5면 ‘동아 해(東亞 解)’에서 ‘동아(東亞)’ 라는 큰 몸, ‘일보(日報)’ 라는 큰 입으로 그 소리가 하늘에 이르고 대지를 움직여 문명의 동산, 즉 독립된 나라로 나아가길 기원했습니다.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의 글씨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출처·http://blog.paran.com/cheonankwangdeokmt/31151889 )
(전략)
성당(惺堂)!!
이 사람의 글씨를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로 동아일보 제호(題號)의 글씨가
바로 이 사람의 글씨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성당(惺堂)이 쓴 동아일보 제호의 글씨는
예서(隸書)의 글씨로
감히 사기(邪氣)가 범접 할 수 없는
강절(剛節)함이 실린 역작(力作) 입니다.
보는 이가 절로
고개를 숙일 정도로 힘이 실려 있지요…
허지만
이곳 태안사에서
보이는 성당(惺堂)의 예서(隸書)글씨는
힘을 안으로 숨기어 놓고서는
한껏 부드럼으로
예(隸)의 묘미(妙美)를 잘 살린 작품 입니다.
(2009년 3월11일 오전 10시18분 태안사 일주문 글씨를 寫 , 4월1일 오후 1시39분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