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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toryⅡ 130 :「단상단하(壇上壇下)」시작

Posted by 신이 On 11월 - 26 - 2013

 정계단평의 대명사「단상단하(壇上壇下)」란이 1952년 10월 22일자 1면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1952년 5월 정치파동을 거쳐 7월에는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이에 따라 8월 5일에는 제2대 대통령을 직선함에 따라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때였다.

 이 란(欄)은 정치부의 백광하 기자가 도맡아 썼는데 독자의 인기를 끌면서 장기게재됐다. 1

 

동아일보 1952년 10월 22일 1면

단상단하
상학시간(上學時間)을 알리듯이 의사당 문앞에 달린 종소리가 두차레나 울린다음에야 선량(選良)들 어슬렁어슬렁 모여들기 시작 – 역시 케케묵은 조세특예법개정안엔 기분이 나지 않는 모양-
◇ 엄상섭 박정근등 의원은 다음날 전개될 상이군인관계(傷痍軍人關係)질문 원고정리에 바뿐가하면 최국현 의원은 국회보에서 부탁한 원고『소회일란(所懷一欄)』에『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써놓고 우리 할일은 다했으니 천명을 기다릴수밖에 없다고 완이(莞爾)!
◇ 목에 난『빨찌』(종창)수술을 하고 백(白)붕대를 감고온 조병문 의원『웨그러냐』고 묻는 말에『빨찌』에다가 개헌안까지 부쳐 발취개헌안 수술을 했다고 대해서 폭소 한바탕-
◇ 이러는 통에 사회 조봉암 부의장은『이의없소?』딱딱-하고 각 조항을 거침없이 주서삼키다가 급기야 36조를 삭제하자는 안도 폐기되고 이를 통과하자는 안도 폐기되어 조항이 송두리채 없어지게 될 때 갑자기『찍ㄱ-』하고 비단찟는 소리에 깜짝 놀란 의원들 단상을 바라보니 김봉재 의원이『정신 채리시오-』하고 강음을 내뿜다가 숨이맥혀 헐떡헐덕-
◇ 그러나 폐기된 항은 살릴부없으니 현행법을 쓸 수 밖에 없다는 조 부의장 설명에 처음부터 삭□를 주장하던 김지태 의원은 저윽히 안심–◇

 

 백광하 기자는 앞서 정부에서 취재제한을 위해 공인기자제(公認記者制)를 만들자 장택상 총리를 찾아가 이 제도를 철회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2

 

“「동아일보」와 합동통신만이 공인기자제를 거부하고 증명서를 받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백광하는 장택상총리를 찾아가 항의했다。그러자 장 총리는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공인기자출입금지(公認記者出入禁止)」라고 써서 자기방문에 붙이게 했다。 다음날부터 그 제도가 폐지된 것은 물론이다。”(백광하 증언·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3면)

 

 “장택상 국무총리는 공보처가 작년말 경에 방침을 수립하고 금년 2월경부터 실시중에 있는 소위『공인기자(公認記者)』제도라는 것이 민주주의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몰상식한 일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유언론을 억압하려는 관권의 발호상만을 노출시키는 반민주적인 처사임에 비추어 작 십이일 총리실에서 공보처 공보국장을 호출하여 그 유래와 내용을 청취하는동시에 그러한 제도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부정적 주장을 하였다. 이철원 공보처장은 방금 서울에 출장중임으로 소위『공인기자』제를 즉시 철폐할 것을 공보국장에게 직접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공보처가 국무총리에 직속되어있는 만큼 특히 대소사를 막론하고 총리의 지시를 받아서 공무를 집행할 것을 앞서 언명한 만큼 공보처당국자가 무어라고 구구한 변명을 하든 간에 그 유래와 경위를 밝히어 불일간 철페하도록 명령할 것이 기대된다.(동아일보 1952년 5월 13일자 2면)

 

 
백광하

 

 

 

Notes:

  1. 백광하, 디지털민속학 http://www.koreandb.net

    1921∼1986. 언론인. 평안북도 운산(雲山)출생.
    1943년 평양에 있는 대동공업전문학교(大同工業專門學校) 광산과를 졸업, 광복 후 월남하여 한국신문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47년 동아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편집국 취재부 차장, 취재1부장, 편집국 부국장을 역임하고, 1962년 논설위원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1952년 10월 22일자부터 《동아일보》 정치면(1면)에 매일 실린 정계단평 〈단상단하 壇上壇下〉는 그가 집필한 것으로 독자들, 특히 노장년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기지와 풍자 그리고 해학이 넘치는 해박하고 재치 있는 필치로 보는 이로 하여금 청량제가 되게 하였고, 《동아일보》의 지가(紙價)를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평생을 청렴결백한 생활로 일관하여 만년에는 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주역 周易》에 심취하여 《태극기와 그 이론》·《양생론》·《천부경종해 天符經宗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정치단평 〈단상단하〉도 10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崔永植〉

  2.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3면, 반세기 쌓인 일화- 정치파동 계엄 속 필사의 취재

    정치파동으로 계엄이 선포되어 있는 가운데 정부의 검열을 받으면서도「동아일보」는 굽히지 않았다。 당국은「동아일보」를 여러가지로 협박했다。 정치부의 백광하 기자도 협박을 당했다。 친구를 통해서는『모 기관원이 자네가 술먹고 집에 들어갈 때 우산 살로 옆으로 꾀어 죽인다더라』는 위협과 함께 붓을 꺾으라고 종용하기도 했다。백광하는 장택상 국무총리를 찾아갔다。
    『나를 잡아가려면 잡아갈 것이지 왜 협박하시오。 』이 말에 장 총리는 즉시 지시하여「동아일보」정문앞에 보초를 두명 두어 백광하가 출퇴근 할 때 경호하게 했다。그러나 백광하는『귀찮다』고 그들을 떼어버렸다。(백광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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