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보성전문 개교
자생적 고등교육 물꼬
합격자 명단 신문 게재
《“대수(代數)식 {(x+a)/(x-a)}²+{(x-a)/(x+a)}²-2를 간단히 정리하시오.” ―동아일보 1934년 4월 5일자》
1939년 2월 이화전문학교를 졸업한 문과 학생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75년 전 입학시험 수학 2번 문제다. 답은 {(x+a)/(x-a)}²-{(x-a)/(x+a)}². 수학은 대수, 기하, 상업산술 등 세 영역에서 7문항이 출제됐다. 동아일보는 이틀에 걸쳐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의 12개 입시 문제와 답을 실었다. 일제강점기여서 ‘국어’는 일본어를 뜻했다. 다른 과목 지문도 일본어로 쓰였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이 1905년 설립했다.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경영 부진으로 재정난에 빠진 뒤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1932년 인수했다.
연세대의 전신은 1899년 고종의 어의(御醫) 호레이스 앨런이 설립한 제중원의학교와 1915년 문을 연 조선기독교대학이다. 제중원의학교는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조선기독교대학은 1923년 연희전문학교가 됐다가 1957년에 두 곳이 합쳐졌다.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일제가 설립했다. 개교 당시 조선인 교수는 전체 57명 가운데 5명, 조선인 학생은 전체 157명 중 47명이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내세운 일제가 1922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한 것을 계기로 민립(民立)대학 설립 운동이 벌어졌지만 모금에 실패했다. 동아일보 1937년 9월 3일 기사는 “15년 전 민립대학 건설을 위하야 각지에서 기부금을 걷울 때 유야무야하게 되엇는데 전북 김제군 백구면 유지들이 한푼 두푼 모은 돈 700원을 알뜰히 보관하여 보성전문 창립 30주년 기념사업과 도서관 건축에 이자까지 합한 1000원을 기부하여 왔다”고 전했다.
식민지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그늘 아래서 전문학교나 경성제대에 입학한 인재들은 우대를 받았다. 1920, 30년대 학교 졸업생은 전공당 10여 명. 신문에 입학시험 합격자 명단을 실었고, 졸업 시즌에는 ‘어느 학교 졸업생 아무개가 미국 유학을 간다’는 단신을 게재했다. 1939년 2월 동아일보는 전문학교 졸업생의 포부를 다룬 ‘교문을 나서는 재원들’ 6회 시리즈 기사도 연재했다.
“이화전문학교 문과(文科) 힘차고 씩씩한 열세 재원, 진취성 잇고 단합력 잇는 것이 특징입니다. …문학 방면에만 힘을 썼을 것이니 책이나 보고 글이나 짓기만 하는 것이 특장(特長)인 줄 알면 잘못입니다. 가진(갖은) 재조(재주)를 다 가진 재원들입니다.”
방자한 행위로 비판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1926년 1월 26일 동아일보에는 한 여성을 두고 ‘삼각쟁투’를 벌이다 강간 미수로 피소된 전문학교 학생을 다룬 기사가 ‘극도로 문란한 학생풍기’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28년 3월 17일에는 ‘작당하고 주점을 순방 폭행하다가 경찰서 구경을 한 전문학교 학생 4명’이 기사화됐다.
광복 후 전문학교는 모두 대학으로 승격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2008년 말 기준 국내 4년제 대학은 199개교, 학생은 240만2111명에 이른다. 147개 전문대를 합치면 317만3965명. 올해 11월 12일 67만7829명의 수험생이 대학 입학을 위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렀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