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동아일보가 이등박문이 살아 있을 때 있었더라면 안중근 의사의 손으로 그 자의 가슴이 박살이 났을 때 동아일보는 ‘통쾌하다! 장하다! 안 의사여!’ 하는 사설이라도 게재하여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데 서울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을 법한 신문이었다.” ( 손점용, ‘역사는 잠들지 않는다’, 문지사, 2003, 248쪽)
안중근 의사 의거(1909년 10월 26일)는 동아일보가 창간(1920년 4월 1일)되기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안중근 의사 의거 20주년을 한 달여 앞두고 1929년 9월 25일자 4면에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이란 특집란을 신설했습니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25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今日)
편자일언(編者一言) ‘신문의 신문’이란 난을 신설합니다. 형식과 내용은 독자의 기대를 따라 수시로 고쳐갈 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구 한국시대의 신문을 통하여 당시의 ‘금일’ 형편을 알아보자는 의미로 이것을 제시합니다. 내용은 각 방면을 통하여 물론(勿論) 초록(抄錄)이나 시시비비의 의견, 수정, 역할 등은 일체로 하지 않고 문구까지라도 원문 원형 그대로 합니다. 신문 종류는 시시(時時)로 교체할 터입니다.
‘신문의 신문’ 란은 안중근 의거 20주년을 한 달여 앞두고 시작, 의거 20주년이 한 달여 지난 뒤 끝낸 것으로 보아 안중근 의사 의거 20주년을 위해 만들어진 특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1929년 10월 28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민보 융희 3년(1909년) 10월 27일자 2면
대한민보 1909년 10월 27일자 2면
이등(伊藤)공작 피해
이등공작이 청국 합이빈에서 본일 상오에 한인에게 중환 피해 하였다더라.
동아일보 1929년 10월 30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민보 융희 3년(1909년) 10월 29일자
범인의 성명 : 합이빈 행흉자(行凶者)의 성명은 일어로 ‘운지안’이라 하였으니 한음(韓音)으로 단정키 난하며 대개 평인(平人)이라 운하더라.
동아일보 1929년 10월 31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민보 융희 3년(1909년) 10월 30일자 2면
범인의 성명 : 작보에 범인 성명은 ‘운지안’이라 하였으나 해(該) 전문은 성명이 서인(西人)의 성명 례를 의하여 도착하였으므로 안응칠로 해석하며 연령은 33세이오 평안도 인으로 포감(浦監)에 재류하는 자이라 운하더라.
동아일보 1929년 11월 3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매일신보 융희 3년(1909년) 11월 2일자 3면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일자 3면
간련피착(干連被捉)
합이빈통신을 거한 측 거월 30일까지 범인의 간련된 자 삼십명이 포박되었다는데 범인 안응칠은 천주교도요 총 노키에 선수이며 장사라고 지목하던 사람이라더라.
동아일보 1929년 11월 5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민보 융희 3년(1909년) 11월 4일자 2면
동경발 2일착
행흉자 진명(行凶者 眞名)
이등공(伊藤公) 저격한 행흉자의 취조 결과에 안응칠(安應七)은 위명이고 본명을 안중근(安重根)이라 칭하고 4년 전 간도에 왕하였는데 기개의 위명을 유하고 현금 간도에 재하여 안다묵(安多默)이라 칭하는 자인데 작년에 아국인(我國人)모로 이등공 암살을 서약하기 위하여 좌수소지(左手小指)를 절단하였다더라.
동아일보는 20년 전, 안 의사의 의거를 옛날 신문을 통해 부족하나마 ‘중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7월 5일자 2면 고정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대답 못할 질문 – 망중한자(忙中閑子)
“ ‘상해가정부’란 문구에 대한 질문이 또 한 장 들어왔다. ‘임시’라는 문구도 있는데 하필 ‘가(假)’자를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무식하다는 책망이다. 기가 마키는 질문이고 책망이다. 차라리 우리가 무식하여 이런 구별도 할 줄을 몰랐으면 좋으련마는 입 가진 벙어리 속이라, ‘독립단’ 이란 문구를 ‘무장단’ 으로, 다시 ‘○○단’ 으로 고쳐 쓰는 이유까지를 질문 하였더라면 우리의 가슴은 마키다 못 하야 터질 것이다. ”
‘입 가진 벙어리 속’ 으로 옛 신문을 빌어 안 의사의 의거를 전했지만 그 속에는 강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대한민보’ 와 ‘대한매일신보’ 의 제호를 크게 뽑아 인용한 것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사원들도 안중근이 이등을 처단했다는 소식이 1909년 10월 26일 오후 6시경 신문사에 들어오자 양기탁, 신채호 등이 축하연을 베풀어 그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사 인사들의 안중근 인식은 안중근 재판과 여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안중근 관계 행적을 보도한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중략)…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독립운동가들은 안중근의 의거를 빌려 자신들이 하고 싶던 이야기 즉, 반일독립 쟁취라는 시대적 열망과 정당성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을 ‘흉도’라고 매도한 황성신문이나 대한민보와는 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의 공판, 소식, 안씨의 기서 등의 제목을 붙여 안중근 의거를 보도하면서 안중근을 흉도라고 표현을 한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 게다가 안중근을 ‘의사’라고 표현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매일신보사의 인사들은 안중근 의거를 내심 반기었다. 이처럼 대한매일신보가 안중근의 법정 투쟁을 집중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안중근에 대한 국내의 인식을 호전시키는 동시에 당시 조선인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일조하였다는 것은 평가할만한 것이다.” (신운용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책임연구원, ‘안중근 의거에 대한 국내의 인식과 반응’, 안중근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09, 129쪽)
동아일보 1929년 11월 10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매일신보 융희 3년(1909년) 11월 9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9일자 3면
안중근 소식
동아일보 1929년 11월 19일자 4면
신문의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매일신보 융희 3년(1909년) 11월 18일자 3면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18일자 3면
안씨 이제(二第)
동아일보 1929년 11월 21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매일신보 융희 3년(1909년) 11월 20일자 2면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0일자 2면
심문 시작
동아일보 1929년 11월 22일자 4면
신문의 신문 – 과거의 금일, 대한매일신보 융희 3년(1909년) 11월 21일자 2면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1일자 2면
이등공 살해한 이유
대판조일신문을 거한즉 여순구지방법원에서 안중근의 초차 심문은 마치고 중죄 재판으로 넘길 터인데 공판할 때에는 방청을 금할 터이오 안중근은 이등공 암살한 이유 십오조를 말하였는데 좌와 같다더라.
일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이 광무구년십일월에 보호조약을 체결한 사
삼 융희원년칠월에 칠협약을 체결한 사
사 태황제폐하를 폐립한 일
오 육군을 해산한 일
육 양민을 살해한 일
칠 이익에 권리를 빼앗은 일
팔 교과서를 불사른 일
구 신문의 구람을 금지한 일
십 은행권을 발행한 일
십일 국채를 쓰게 한 일
십이 동양에 평화를 요란케 한 일
십삼 보호정책이 말과 같지 아니한 일
십사 일본 전황제를 살해한 일
십오 일본과 세계를 속인 일이라 하고
또 연루된 사람은 조도원 만연준 탁공투 김려수 김성옥 유강료 정대호 김형재라 하더라.
위에 앞서 동아일보에 ‘안중근’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안성근(安聖根)’에 대한 기사에서 입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0일자 3면
안중근 친제(親弟)의 거처
일본 대관을 암살하기 위하여
폭발탄을 가지고 일본에 잠입
동경경시청에서는 북경으로부터 급한 정보가 왔는데 합이빈에서 이등박문공을 암살한 안중근의 친제 안성근(安聖根, 38)이가 폭발탄 몇 개와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인쇄물을 가지고 천진을 출발하는 상선회사의 장사환을 타고 비밀히 일본으로 향하였다 하였음으로 경찰 당국에서는 별안간에 활동을 하는 중이었는데 안성근은 천진을 떠나기 전에 동경시 신전구 원락정 20번지 갑주관에 유숙하는 자기 친구에게 동경으로 간다는 전보를 한 사실까지 있어서 문사 신호 대판의 각 경찰부에서는 서로 협력하여 각 방면으로 수색을 하였으나 안성근은 발견치 못하고 장사환은 이미 문사와 신호를 거치어 지나간 5일에 대판에 들어왔으되 안성근의 행적이 없음으로 혹은 중간에서 경찰 관헌의 눈을 피하여 어느 곳으로 행적을 감춘 듯하다하여 대 수색을 하는 중이며 안성근은 원래 동경에 있을 때에 제국대학 문과를 마치고 일본말도 매우 교묘히 하며 그는 월전에 상해에서 전중(田中) 대장을 암살하려하다가 체포된 김익상들과 같은 의열단의 한 사람으로 일직이 일본인의 사회주의자들과 연락을 하여 항상 원로 대신을 암살코저 하든 사람임으로 경시청에서는 방금 크게 활동 중이라더라.(동경)
그러나 안 의사의 친동생 중에 ‘안성근’은 없으므로 1922년 당시 38세였던 안정근(安定根, 1884년생)의 오기로 보입니다. 그즈음 안정근에 대한 또 다른 기사입니다.
동아일보 1922년 2월 5일자 3면
재상해(在上海) 대한적십자사 총회
사장은 안정근(安定根)이 취임하고 널리 주의를 션젼할 터라고
안 의사의 또 다른 동생 안공근(安恭根)씨에 대한 기사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2월 20일자 2면
상해한인교민단장 변경, 후임은 안공근(安恭根)씨
안공근의 둘째 아들 안낙생(安樂生)도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27년 7월 15일자 2면
상해의 반동정치
횡액 당하는 재주(在住) 동포
폭풍우 같은 대 수색
법조계 전부에 확대
중, 불, 일 연합 경관대 활동
불측 차종(此種) 태도는 금번이 처음
(전략)…불란서 순경 중국 순경 일본 순경 도합 이십여 명이 자동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중략)…중요한 조선 사람의 집 아홉 곳 즉 김종상 김보연 현정건 여운형 최석순 한진교 김철 염온동 안낙생 씨 등의 집을 포위하고…(후략)
동아일보 1938년 12월 1일자 2면
안중근의 조카 안낙생(安樂生)을 압송
안 의사의 사촌 안명근(安明根)에 관한 기사.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자 2면
안명근(安明根)씨 가출옥(假出獄)
십오년 동안 징역하다가
하루빈 정거장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씨의 종제로 일직이 일한병합 되던 해 당시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백을 암살코자하던 안명근(安明根)씨는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이래 십오년 동안 경성형무소에서 철창생활을 하다가 지난 9일에 가출옥이 되었는데 씨는 처음 무기징역이 여러 번 감형이 되어 내년 5월 16일에 만기출옥이 될 터이었으나 금번에 가출옥이 된 것이며 씨의 집은 중국 길림성 중동선구첨에 있는데 67세 노친이 기다리고 있다 하며 씨는 11일 오전 8시 남대문을 떠나 황해도 신천 자기 처가로 갔다더라.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자 2면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자 2면
창상(滄桑)의 십오년
안명근씨의 감상
신천 고모 댁으로
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 2면
일희일비(一喜一悲)의 향관(鄕關)에
안명근 씨의 신천 도착과 경찰 관헌의 환영회 금지
경술년 십이월 입감 이후로 꼿 피고 낙엽 지는 전후 십오개년을 경성형무소 철창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지난 구월에 광명한 텬디에서 정든 산천과 사랑하는 동포를 보게 된 안명근 씨는…(중략)…부인과 재종들의 친족 그의 동범이었든 배경진(裵敬鎭)씨를 위시하여 수십명의 친우가 환영하여…(중략)…신천 시내 유지 일동은 유량한 양악을 선두로 하야 산자수명한 화산에서 다과회를 개최하려고 하얏스나 당국의 엄금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후략)
동아일보 1924년 11월 3일자 5면
안명근(安明根)씨 근황
청계동 구택(淸溪洞 舊宅)에서 과수 재배로 수양(修養)
동아일보는 안명근 의사의 부인 권 수산나 여사의 삶도 소개합니다.
동아일보 1925년 2월 28일자 2면
고침단몽(孤枕短夢) 십오 재(載)
기담 애화 진문 일사(10)
신천=북대(北隊) 순회기자 임원근
권씨 애화
남편이 입감한 후 불운에 번롱되던 안명근씨 부인
(전략)…안명근 씨도 지난해 3월 5일에 이르러 뼈가 녹고 살점이 부서지는 듯한 15년 간의 철장생활을 마치고 새로이 굴레밖의 사람이 되어 보다 자유스러운 생애를 이루게 되었다.
일조(一朝)에 생이별
남편의 건강을 위하여 그때부터 기도
◇…그러나 이같이 씨가 하루아침에 사로잡힌 몸이 되어 햇발을 구경하지 못하고 세상의 일만일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의 부인 권수산나(50)여사는 다만 홀로히 풍진많은 세상에 남아있어 과연 어떠한 번롱의 운명을 당하고 또한 얼마나 창자 끊어지는 애사를 지어내였던가. 열다섯해 동안이나 되는 길고도 긴 세월을 한갓 홀로히 하루가 열흘 같이 그의 남편을 기다리고 사모하였을 때 과연 그의 가슴에선 우수와 번민의 불길이 끊일 날이 없었고 그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오직 남편의 건강과 다행을 위하여 끊임없는 기도를 들였을 뿐이었다.
경술년 12월
바야흐로 35세
◇…뜻 아니 한 하루아침 모진 바람에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던 자기의 남편을 생지옥 철창 아래로 이별을 하게 되던 때는 마침 경술년 12월 15일 권씨 부인의 나이 바야흐로 인생의 봄빛을 자랑하던 35세의 장년 시기였다. 부인은 안씨로 더불어 단락한 가정생활을 계속한지 불과 17년 미만에 이같이 원통한 생이별을 이루게 되었다.…(중략)…
3년간 청계동
고국강산을 이별하고 북국에 방랑생활
◇…그러나 평일에 ‘로마교’의 신조가 착실하고 사량(思量)이 깊고도 넓은 권씨 부인은 이미 당하여 놓은 일이라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을 단념하고 오로지 자기 남편의 궁금한 하회를 기다리면서 그 후로 3년 동안은 청계동의 옛 터전을 지키고 한갓 논밭에 풀 뽑기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에 눈물 젖은 3년간의 세상살이로 어느덧 꿈밖으로 지나쳐버리게 되었었다.…(중략)…그 어느 해 봄철엔가 최후로 자기남편에게 마지막 면회를 하여주고 금시로 미여질 듯한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 그 당시 스물한 살 된 맏아들 의생(毅生)과 여덟 살 된 둘째아들 양생(陽生)으로 더불어 길들었던 고국강산에 피눈물을 뿌리고 그대로 서백리아 거친 벌판을 향하여 방랑생활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파상(波上)의 부평초
목릉현서 아령으로 원한의 구곡간장
◇…우선 목릉현 팔면통이라는 곳에 첫발을 멈추고 어린 아들들을 교육시키면서 3년 동안 농업에 종사를 하여오다가 또다시 그 후로는 아령(俄領)으로 발길을 옮기어 마치 물위에 뜬 부평초와 같이 흐르고 또 흐르고 휘돌고 또 휘돌아서 마침내 ‘허바로스코’와 ‘소학령’ 등지에서 혹은 3년 혹은 2년씩 농사를 지어먹으며 .…(중략)…
설원에 혈혈단신
두 형제는 북경으로 눈벌판에 외로운 꿈
◇…그러나 이에 이르러 권씨 부인은 또다시 수족같이 여기던 아들 형제와도 어쩔 수 없는 새로운 이별을 이루게 되었다.…(중략)…
구허(舊墟)의 낙원
꿈인 듯 생시인 듯 지난봄에 상봉
◇…권씨 부인은 그 뒤를 이어 10여년 만에 또다시 신천군 청계동의 옛 동산을 찾게 되어…(중략)…열다섯해 동안의 그리웠던 온갖 사랑과 정회를 풀어가면서 청계동 평화로운 낙원에서 행복에 잠긴 날을 보내게 되었다.
안 의사의 셋째 동생으로 소개된 동아일보 1925년 4월 10일자와 13일자 부록 2면 기사 중 봉근(鳳根)은 안 의사 숙부의 아들, 사촌동생입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10일자 2면
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1)
안중근 계수 최씨(季嫂 崔氏)
정처없이 떠나
자유로운 땅을 찾아
◇…북만주 할빈역에서 한번 울리는 피스톨의 음향과 함께 교수대 위에서 원한의 눈물을 뿌리고 한 방울의 이슬이 된 안중근은 사형제로 셋째 동생되는 봉근 씨는 큰 형님의 원한 깊은 죽음 둘째 형님 명근 씨의 십오년 간에 철창생활 모든 것이 가슴에 뜨거운 불을 붙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씨는 모든 불합리한 비분 원한을 가슴에 품고 부자유로운 땅을 벗어나자 유지대로 ‘민족을 위하여’라는 굳은 결심으로 사랑하는 아내 최씨 부인(30)과 당시 다섯 살을 맏으로 한 살된 아들까지 삼 형제를 쪽박에 밤쏟듯이 뒤에 두고 정처없는 발길을 내여 디디게 되었습니다. 씨가 임금같이 붉고 통통한 어린 뺨 위에 주먹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석별의 애타는 키스를 어린 이마에 던진 후에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부인과 다시 성공하는 날을 굳게 언약하고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나도 다시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고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13일자 부록 2면
안중근의 계수 최씨 부인의 애화(2)
안중근 계수 최씨(季嫂 崔氏)
이와 같이 창익이가 하루아침에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두고 간 뒤에 그들의 생활은 더 참담하였습니다.…(중략)…그 기나긴 동안에 한번 간 그의 남편은 소식조차 망연하여 생사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삼년전에 상해에서 해주사람이 그가 기다리는 남편 봉근씨를 만났었는데 그는 자기의 가족을 자기처남에게 맡기었음으로 아주 안심하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을 듣는 최씨 부인의 맘은 더 미여지는듯하였습니다. 그 후에 아들 창익이도 상해로 건너간 소식을 들은 최씨 부인은 어린 아들 삼 형제와 딸 창수를 데리고 좀 자유로운 지대로 가서 혹이나 남편을 만날까하는 생각으로 김군과 함께 상해로 며칠 후에 떠날 터이라는데 그 어린 남매들은 수양산 머리에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빨리 떠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합니다.(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안씨 일가의 활동들도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
1924년 8월 4일자 2면
평양서(平壤署) 안모 체포(安某 逮捕)
중대사건 내용은 절대비밀
(전략)…모처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긔(前記) 안모는 붣날 하루빈에서 일본 정객 이등박문을 총살한 안중근 씨의 친척이요 또 로국(露國)에서 평양에 드러온 이래 중화군과 기타 각디를 수차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야 무삼 일을 계획하는 듯함으로 이미 중화경찰서에서도 그 련루자로 청년 이삼인을 검거하고…(후략)
1929년 4월 25일자 2면
안중근 재종제(安重根 再從弟)로 각국에서 ○○운동
경찰에 판명되는 공명단 정톄 상해공명단장 안화명(安華命)
세상을 놀래이던 공명단원 세 명이 경긔도 경찰부에 톄포되어 엄중취됴 중이라 함은 긔보(旣報)하얏거니와 동(同)단 본부 단장과 뎡확한 단원 수효는 아즉까지 확실치 못하나 상해지부장은 안화명(安華命)이라는 이등박문공을 하루빈에서 암살한 안중근의 재종제(再從弟)라하며 출생디는 황해도 송화인데 십여 년 전에 조선을 떠나 중국 각디는 물론이오 멀리 미주와 구라파의 독일 로서아 등 제국을 순회하며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십여 년 전부터 경찰 측에 주목의 초점이 되였다더라.
안 의사나 안명근 의사와 함께 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후속보도도 실렸습니다. 안 의사 의거를 자원 변론한 안병찬(安秉瓚)이 암살됐다는 설에 대해서는 1면 사설까지 써서 해외동포에게 민중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1922년 9월 21일자 3면
안병찬 씨 암살설
최근 만주지방 모처에서
파란(波瀾) 만흔 그 일생
최근에는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공산당에 전력을 하여 왔다고
(전략)…그 후에 또 유명한 안중근 사건에도 씨가 자원하고 변호하기 위하여 합이빈까지 간 일도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씨는 점차 배일파로 지목되매…(후략)
1922년 9월 22일자 1면
안병찬씨 피살설을 문(聞)하고
해외동포에 고함
1926년 10월 26일자 2면
안명근(安明根) 공범 원행섭(元行燮)씨 가출옥(假出獄)
십일년간 옥중생활을 하다가
1930년 10월 28일자 2면
안중근에 제자(提資)한
김경산(金京山)을 체포
안중근사건의 김경산 피착
신의주경찰서에서
(신의주지국 전보) 26일 오후 신의주경찰서에서는 54, 55세 가량의 늙은 신사 1면을 검거하여 엄중한 취조를 하는 중이라는데 사건의 내용은 극비밀에 부치나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노인은 평북출생인 김경산으로 그는 20여 젼 합이빈 역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암살한 안중근(安重根)의 동지로 그 당시 안중근에게 암살운동비 6천원을 조선 안에서 모집하여 제공하였다하며 그는 그동안 만주에 유랑하며 조선○○운동을 맹렬히 하였다는바 그는 지난달에 모종의 중대 사명을 띠고 조선에 잠입코자 신의주에 건너와 잠복하였는 것을 탐지되어 검거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 11월 3일자 2면
이등박문공 암살 당시 자금 육천 원 조달
손중산(孫中山)과 악수로 상해일보(上海日報) 발간
상해 재주(在駐) 일본 영사 모씨도 암살 계획
안중근 공범 박경식(朴景植)의 내력
(전략)…이등박문공을 암살한 안중근의 동지 한명을 인치하고 엄중 취조한 결과 그는 평북 박천에 본적을 둔 박경식(朴景植, 52)으로…(중략)…김경산이란 변명으로 잠입하다가 그와 같이 검거된 것이라는데 수일 후이면 신의주검사국에 송치되리라한다.
1930년 11월 7일자 2면
이등공 암살 공모는 시효 경과로 무죄
최근 범행 업스면 방면
안중근 동지 박경식(朴景植)
동아일보 1930년 11월 10일자 2면
사민신문(四民新聞)으로 주의(主義)를 선전
김창숙(金昌淑)과도 악수하고 활동,
안중근 공범 박병강(朴炳疆)
(전략)…고 이등공을 암살한 안중근의 동지로 활동하든 평북 박천군 출생 박경식(朴景植)에 대하여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박경식은 원래 조선에 있을 때 박병강(朴炳疆)으로 행세하고 있다가 한말 풍운이 바야흐로 급해지매 일직이 충남 충북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었다가 실패하고 관서지방에 은거하여 있던 유인석이란 당시 유림계의 혹성 같은 학자의 문제(門弟)가 되어 글을 읽다가 마침내 뜻을 ○하고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초연히 조선을 떠나…(후략)
‘해외 풍상 20년
귀국하자 철창입(鐵窓入)‘
본보의 긔사 보고 알게 되어
도신(到新)한 장자 박시훈 담(談)
별향 신의주경찰에 구금되어 있는 박병강의 소식을 본보 지상으로 알고 8일 본보 신의주지국을 방문한 박병강의 장자되는 박시훈(35)씨는 의복 한 벌을 가지고 20여년 만에 갖은 풍상을 겪고 귀국하자 철창에 신음하는 친부에게 차압하겠다는 뜻을 말하고…(후략)
1930년 11월 27일자 2면
안중근 공범 박병강(朴炳疆)
시효 넘어 무사방면
오래 고생하다가 출옥해
(고향 평북 박천에 귀환)
동아일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중근’이란 이름을 신문에 실어 조선 민중의 가슴에 안중근 의사가 살아있도록 애썼습니다.
1923년 2월 26일자 3면
이순신전 발행
박은식씨의 신 저술
상해 독립신문사 사장 백암 박은식 씨의 고심 노력한 결과 순한문으로 ‘이순신전’을 편찬하였는데 박은식 씨는 일찍이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순한문으로 발간하고 그 후 ‘대한독립운동사’ 등 많은 서적을 순한문으로 발행하여 중국인에게도 많은 환영을 받았는데 금번에도 ‘이순신전’을 발간하여 중국인에게 이순신 씨의 전후에 없는 발명가인 것과 사회도덕의 모범가인 것을 알게 하고자 한다하며 그 발행인은 김희산 씨이요, 정가는 은 삼각(銀 三角)이라더라. (길림)
1925년 11월 4일자 2면
박은식씨 장서(長逝)
일일 오후 칠시 상해에서
우연히 병마의 침로를 입어 용태가 매우 위중하던 박은식씨는 드디어 지난 일일 오후 일곱시경에 육십칠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더라. (3일 상해 특신)
◇ 약력 선생은 평북 영변군 태생으로 구(舊)한국시대에 황성신문사에서 고 유근 씨와 같이 집필한 일이 있었다 하며 서북학교장을 지내고 조선광문회에서 저서에 힘쓰다가 신해년 추(秋)에 서간도 환인현(桓仁縣)으로 건너가서 저서에 전력하다가 계축 삼월 경에 북경으로 갔다 하며 이후 중국 각지와 아령(俄領) 각지로 다니다가 상해로 가서 ‘독립신문’ 및 가정부(假政府) 대통령 등을 지냈다는데 선생의 저서로는 ‘동명왕실기’·‘명양답부전’·‘한국통사’·‘안중근전(安重根傳)’ 기타가 있다더라.
1926년 5월 2일자 2면
범행의 원인은 총독으로 오인(誤認)
종로서에서 취됴한 결과 범인의 의사가 판명되여
고 안중근씨를 숭배
“순박한 시골 청년이던 송학선은 수년 전부터 일제식민지 권력의 상징인 조선총독 재등실을 처단하기로 뜻을 세운 바 있었다. 그는 의거 3년 전부터 안중근 의거를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중 융희황제 승하 소식을 접하게 되자 그는 조선총독 재등실을 처단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던 것이다. 4월 28일 조문을 위해 재등실 총독이 온다는 정보를 접한 송학선은 금호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경성부협의회 의원 좌등호차랑(佐藤虎次郞)을 재등실로 잘못 알고 의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장석흥, 한국독립운동의역사 제40권 6·10만세운동, 독립기념관, 2009, 70쪽)
“평범한 필부가 감행한 단독의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중의 충격과 감동은 배가되었다. 동아일보는 그의 의거를 ‘조선 민중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하였고, 시대일보는 그를 대중운동의 ‘선구자’로 비견해 표현하였다.” (김영범, 한국독립운동의역사 제26권 의열투쟁 독립기념관, 2009, 255쪽)
일제 치하에서 못 다한 안중근 의사 관련 보도는 해방과 함께 동아일보가 복간(1945년 12월 1일)되며 끊임없이 이어져 순국 52주년(1962년 3월 26일)을 즈음해 안 의사의 재판기록을 발굴, 1962년 3월 27일~5월 3일까지 31회에 걸쳐 연재한데 이어 1979년 9월 19일~9월 24일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4회 연재했습니다.
1962년 3월 27일자 석간 2면
법정의 안중근 의사 – 처음으로 공개되는공판기록
동아일보 1979년 9월 18일자 1면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 자전완본(自傳完本) 발견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 사진은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당시 여순(旅順)법원의 통역관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입수한 것으로 안 의사의 옥중사진은 국내외에 여러 장 있으나 사진 옆에 ‘사형집행 5분전’이란 글자가 박혀 순국 직전에 찍은 것으로 증명되는 것은 이 사진 뿐이라고 합니다.)
동아일보 1976년 2월 10일자 7면
“간디는 한반도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1909년 10월 26일자 신문기사에서, 간디는 한국의 애국자이며 사상가인 안중근이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에 대해 고찰하였다. 이토는 조선의 주권을 일본의 망석중(꼭두각시 – 편집자 주)으로 전락시키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절멸시키기 위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한 주범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법정에 선 안중근은 이토가 주변국에 대한 일제의 야심을 가장 강력하게 실현한 사람이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말했다. 간디는 한일 관계의 역사에 대한 일본의 선동선전을 똑바로 간파할 만큼 깊은 정치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간디는 이토가 용감한 일본의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그릇된 애국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토는 자신의 용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 한국을 종속시켰다. 이는 바로 권력의 중독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론에서 간디는 이렇게 썼다. ‘민중의 진정한 복리를 가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사티아<진리> 그라하<파악> – 편집자 주)의 길로 이들을 인도해야 한다.’ 간디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을 건설한 방식대로 인도를 건설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판카즈 모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간디와 인도의 독립운동 – 인도 고유의 역사 전통을 기본으로 한 간디 사상에 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와 백범 김구 기념관, 백범학술원 주최 ‘아시아 민족독립운동과 건국지도자’ 국제학술대회, 2009년 10월 9일, 백범 김구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