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5호)
重刊과 함께 중흥 이끈 ‘CEO 3총사
국장 8회 주필 11회…동아일보 근무 한줄 경력 외길
고재욱(高在旭, 1903~1976)
이희승의 뒤를 이어 12대 사장에 오른 고재욱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서 태어나 고향 창평학교를 거쳐 중앙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일본 야마가다고교를 거쳐 교토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31년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경제부 기자를 거쳐 경제부장, 편집국차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1940년 8월 강제폐간과 더불어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 중간(重刊)과 함께 다시 편집국장, 주필 등을 맡았다. 1961년 7월 부사장이 됐고, 1965년 7월 사장에 취임했다.
심강(心岡) 고재욱은 한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물게 경력이 단 한 줄 ‘동아일보 근무’뿐이다. 편집국장 여덟 번, 주필 열한 번을 지냈다. 그가 흔들림없이 한 언론사에만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아일보의 경영이 순탄했던 데다 그 자신이 설립자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촌의 처조카이다.
그는 조용하고 단아한 선비였다. 과묵하고 신중했으며,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 제작에는 엄격했다. 그가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논설위원에게는 사설 집필을 금지시켰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우승규(나절로) 전 편집국장은 심강 1주기 추도사에서 “그는 타사의 고용된 주필과는 전혀 다르다. 그분의 명령이 떨어지는데 따라 ‘동아 노선’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명(文名)을 날린 저명한 교수들을 논설위원으로 발탁했고, 타사의 젊고 유능한 기자 스카웃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심강은 1962년 7월 논설위원 황산덕이 쓴 사설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로 황 위원과 함께 구속돼, 5·16 후 사설로 인한 언론인 구속의 첫 케이스를 기록했다. 두 사람의 구속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후 구속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고재욱은 구속 6일 만에 풀려났으나, 황산덕은 4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심강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언론윤리위원회 법안을 좌절시킨 일이다. 군사정부는 1964년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이 법안을 국회에서 강행 통과시켰다.
당시 편집인협회장이었던 심강은 다른 언론계 대표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유성 담판을 가져, 결국 법안의 공포 보류 형식으로 이 법안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심강은 이 공로로 다음해 런던에서 열린 IPI 총회에 초청받아 ‘IPI가 추구하는 언론자유의 영웅’으로 소개되는 영광을 안았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