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0호)
‘일장기 말소’ 기자 개인보다 회사의 숨은 방침
1936년 8월 25일자 2면 무기정간 뒤
해직 투옥 고행길
<이길용(李吉用), 1899~?>
손기정 선생은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던 9만여 관중은 2시간29분19초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작은 체구의 동양인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아시아인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었지만 상의에는 일장기가 선명해 망국의 한을 일깨웠다.
8월 10일자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처음 전한 뒤 이튿날부터 ‘조선의 아들 손기정’ 시리즈를 발 빠르게 연재했던 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2면에 손 선수가 시상대에 서 있는 현장 사진을 게재했다. 일본 현지 언론을 통해 구한 사진 속에 뚜렷하게 있던 일장기가 동아일보 지면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치하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저항정신을 일깨운 이 사건의 중심에는 사회부 체육주임으로 일하던 이길용 기자가 있었다.
독자들은 크게 반겼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동아일보는 8월 27일부터 무기정간을 당했고 9개월도 더 지난 이듬해 6월 2일에야 복간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자신도 해직을 면치 못하고 투옥까지 됐던 이길용 기자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길용 기자가 동아일보에 몸담게 된 데는 고하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과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을 마치고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온 그는 철도국에서 일하던 1919년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운송하다가 적발돼 수감됐다. 고하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옥고를 치를 때였다. 1921년 고하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기자는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옥고를 치렀고 광복 때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이 기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체육기자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손기정 선생과 함께 출전했던 ‘한국 농구의 아버지’ 이성구 선생은 생전에 ‘선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실력이 출중했고 체육계 전반을 좌지우지했던 분이었다.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진작한 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길용 기자는 한국 기자 최초로 ‘조선야구사’를 연재하고 인천의 야구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대한체육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그를 기리기 위해 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 매년 체육기자 한 명을 선정해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정부는 그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7년 8월 25일 한국체육언론인회(회장 이종세)와 한국체육기자연맹은 서울 중구 손기정 기념관에서 중견 조각가 이용철 작가가 만든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높이 90cm, 가로 64cm, 세로 35cm로 실제 인물의 1.3∼1.4배 크기다. 흉상 제막식이 열린 날은 손기정 선생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던 날이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