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진(吳允珍, 1909~1993)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1928년 동아일보 강계지국 기자로 입사했다. 1929년 5월 1일 국제노동기념일에 불온한 포스터를 시내 곳곳에 붙였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돼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1935년 12월까지 강계지국 지국장을 맡았다. 건국훈장 애족장(1990) 서훈.
-평안북도- 강계(江界)……한경하(韓炅夏, 1921. 5~) 강병주(姜炳柱, 1924.12~) 김신경(金信京, 1928.11~) 이원행(李元行, 1930.12~) 오윤진(吳允珍, 1931. 9~) 한봉민(韓鳳珉, 1935.12~)
(역대지국장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사고(社吿)
一、명칭(名稱) 강계지국(江界支局)
一、위치(位置) 강계군 강계면 동부동(江界郡江界面東部洞)
一、구역(區域) 강계군 일원(江界郡一圓)
一、직씨명(職氏名) 지국장 김신경(支局長金信京)
기자 오윤진(記者吳允陳)
고문 백인옥(顧問白仁玉)
동(同) 장세호(張世晧)
우(右)와 여(如)히 변경(變更)함
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28년 11월 13일 6면)
사고(社吿)
기자 오윤진(記者吳允珍) 기자 황영호(記者黃永浩) 우(右) 사임(辭任)함
동아일보사 강계지국(東亞日報社江界支局)
(동아일보 1929년 8월 11일 6면)
사고(社吿)
기자 이덕주(記者李德周) 우(右) 사임(辭任)함
기자 오윤진(記者吳允珍) 기자 김경원(記者金炅元) 우(右) 취임(就任)함
동아일보사 강계지국(東亞日報社 江界支局)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 3면)
사고(社吿)
오윤진(吳允珍) 임 강계지국장(任江界支局長)
강계지국장(江界支局長) 이원행(李元行) 의원해직(依願解職)
금반(今般) 우(右)와 여(如)히 폐사 강계지국(弊社江界支局)을 변경(變更)하얏삽 기 자(玆)에 근고(謹告) 하나이다
소화10년 12월1일부(昭和十年十二月一日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31년 9월 24일 3면)
사고(社吿)
한봉민(韓鳳珉) 임 강계지국장(任江界支局長)
강계지국장(江界支局長) 오윤진(吳允珍) 의원해직(依願解職)
금반(今般) 우(右)와 여(如)히 폐사지국(弊社支局)을 변경(變更)하엿삽기 자(玆)에 근고(謹吿) 하나이다
소화10년 12월1일부(昭和十年十二月一日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35년 12월 11일 4면)
지방여론(地方輿論)에 소(訴)함 제20(第二十) 강계편(江界篇) -(1)-
(동아일보 1931년 1월 7일 3면)
지방여론(地方輿論)에 소(訴)함 제20(第二十) 강계편(江界篇) -(2)-
(동아일보 1931년 1월 8일 3면)
지방여론(地方輿論)에 소(訴)함 제20(第二十) 강계편(江界篇) -(3)-
(동아일보 1931년 1월 9일 3면)
지방여론(地方輿論)에 소(訴)함 제20(第二十) 강계편(江界篇) -(4)-
(동아일보 1931년 1월 10일 3면)
지방여론(地方輿論)에 소(訴)함 제20(第二十) 강계편(江界篇) -(完)-
(동아일보 1931년 1월 11일 3면)
『강계총관(江界總觀)』출간(出刊)
◇오씨(吳氏) 고심(苦心) 2년(二年)의 저서(著書)
평북 강게(江界) 오윤진(吳允珍)씨는 이미 2(二)년동안 고심전력으로 재료를 수즙하야 편찬중이든 강게총관(江界總觀)이란 책자는 노력한 보람이 잇어 그동안 인쇄도 마치어 12(十二)월 25(二十五)일에 간행물을 발행하게 되엇다 한다.
오씨는 본사 강계지국장으로서 강계지방을 천하에 알리는데 처음으로 출판된 없지 못할 책자인데 책은 국판 3(三)백여 페-지로서 강계 전경의 구회(口繪)를 비롯하야 내용은 강계에대한 면밀한 통게숫자로 명승지、고적、각 읍면의 연혁과 교육기관、종교、언론기관、단체의 연역과 사업、체육계 등 각 방면 시설에 긍한 상세한 기록에다가 역사를 상세히 추가하야 금상첨화의 저술을 보이고 잇는데 정가는 1(一)원 50(五十)전이요 발행소는 본사 강계지국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3년 12월 21일 5면)
강계불온문사건(江界不穩文事件) 오윤진 등 종예(吳允珍等終豫)
로동긔념일에 포스타 부티고… 치유법위반(治維法違反)으로 공판 회부(公判廻附)
【강계】지난 오월일일 국제로동긔념일(國際勞働記念日)에『농민로동자 ○○을 ○○하라』『자본가 디주 ○○를 ○○하라』『피압박 민족을 ○○하라』는 등 불온한 포스타를 시내 각처에 첨부하얏다는 사건으로 동일 강계경찰서에 구금되어이래 경찰과 검사의 취됴를 마치고 예심에 걸리어 오개월간이나 텰창 생활을 하든 오윤진(吳允珍) 등 삼인은 지난 삼십일에예심이 종결되어 신의주디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엇다는데 그 주소와 씨명은 다음과 갓더라
본적(本籍) 강계군 강계면 서부동(江界郡江界面西部洞) 주소(住所) 동상(同上) 오윤진(吳允珍)(21)
본적(本籍) 강계군 강계면 동부동(江界郡江界面東部洞) 주소(住所) 동상(同上) 황영호(黃泳浩)(21)
본적(本籍) 강계군 강계면 동부동(江界郡江界面東部洞) 주소(住所) 동상(同上) 김경원(金炅元)(23)
(동아일보 1929년 11월 5일 7면)
오윤진[吳允珍]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1927년 11월 강계청년동맹위원장(江界靑年同盟委員長) 및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있으면서 사회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하여 비밀결사 강계청년동맹과 농민사(農民社) 등을 배경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고 한다.
1929년 5월 1일 국제노동기념일(國際勞動紀念日)을 계기로 포스터 등을 강계시내에 부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30년 8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日報(1929. 5. 29, 6. 3, 11.5, 11. 9, 1930. 6. 14, 8. 29)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독립유공자 공훈록 9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