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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동아일보 사람들- 신낙균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신낙균(申樂均, 1899~1955)은 경기 안성 출신으로 일본 동경사진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경성사진사협회 회장, 경성사진사강습원 원장을 지냈다. 1934년 7월 동아일보 사진과장으로 입사했으며 사진부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일장기 말소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돼 40일간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공훈록 일부 :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세계의 강호들을 당당히 물리치고 우승하자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기자로 있던 그는 이 감격적인 민족적 쾌거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낙균을 비롯하여 백운선(白雲善)·이상범(李象範)·서영호(徐永浩)·이길용(李吉用)·장용서(張龍瑞)·현진건(玄鎭建)·임병철(林炳喆)·최승만(崔承萬)·송덕수(宋德洙) 등의 동아일보 사원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40여일에 걸친 문초를 받았으며, 동아일보도 네번째의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 출처 : 독립유공자 공훈록

 

신낙균(申樂均) (서울, 1899~ ) ▲ 1934. 7 사원(사진과), 사진과장. 1936. 9.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독립유공자 공훈록》

관리번호 : 1469

성명 : 신낙균
한자 : 申樂均
생년월일 : 1899-04-13
사망년월일 : 1955-04-04
본적 : 경기도 안성
주소 : 서울 鐘路 八判 62의 2

운동계열 : 문화운동
포상년도 : 1990
훈격 : 애족장

공훈록 :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세계의 강호들을 당당히 물리치고 우승하자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기자로 있던 그는 이 감격적인 민족적 쾌거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낙균을 비롯하여 백운선(白雲善)·이상범(李象範)·서영호(徐永浩)·이길용(李吉用)·장용서(張龍瑞)·현진건(玄鎭建)·임병철(林炳喆)·최승만(崔承萬)·송덕수(宋德洙) 등의 동아일보 사원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40여일에 걸친 문초를 받았으며, 동아일보도 네번째의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6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679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적개요
3.1運動 당시 安城郡 元谷面 萬歲示威에 참가하였으며 1936년 伯林올림픽대회에서 孫基禎 선수 등이 세계를 制覇하자 東亞日報에서는 日章旗를 抹消 報道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세계에 韓民族의 우수함을 과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한 사실이 확인됨. 
 

(‘독립유공자 공훈록’·’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일장기말소사건

1936년 8월 25일자 본보 제2면에는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 실렸던<追記=본사 최인진 전 사진부장은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2006년 신구문화사) 94~104쪽에서 문제의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진 출처는 후쿠오카 규슈지사에서 발행한 1936년 8월 23일(일요일)자 제19,695호 ‘오사카 아사히신문’ 제5면 ‘오사카 아사히신문 남선판’과 ‘오사카 아사히신문 조선 서북판’이라고 밝히고 있음>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전재했다. 손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하여 실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본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당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세계제패는 우리 민족을 흥분케 했고, 승리의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가지지 못하고 일본의 것으로 넘겨주어야 했기에 너무나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민족의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 대변지를 자임해 온 본보가 이를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누구의 지시나 명령도 아닌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길용 체육부 기자가 조사부 소속 본보 전속화가 이상범 기자에게 일장기 처리를 의논하였는데, 그때 둘은 그저 빙그레 웃었을 뿐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이심전심, 내민 자도 받은 자도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었던 것이다. 일장기 말소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32년 김은배 선수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에서 마라톤 6위로 입상했을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기술적으로 말소했던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총독부 측의 트집 없이 넘어갔던 경험도 있어 그들은 이번 일장기 말소에도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1936년 8월 29일자로 본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관계 인사들의 구속에까지 이르렀다. 사진부의 백운선 서영호, 그 사진을 실은 사회부 편집자 장용서 임병철, 사진과장 신낙균, 조사부 전속화가 이상범, 체육부 이길용, 그리고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차례로 연행되었다. 그 후 이 동판을 ‘신동아’가 실었다 하여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부의 송덕수가 추가 연행됐다. 당시 경찰부 유치장 방 6개가 모두 동아일보 기자들로 차 동아일보를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이때 끝까지 구속이 풀리지 않은 사람은 사진 수정의 발안자인 이길용, 사진 수정에 직접 가필한 이상범, 사진부 제판기술자 백운선 서영호, 사진과장 신낙균, 그 사진을 게재한 장용서, 사회부장 현진건, 그리고 ‘신동아’에 게재한 잡지부장 최승만 등이었다.

이 사건의 발생으로 김준연 주필과 석왕사에 체류 중이던 설의식 편집국장이 즉시 사임하였고, 12월에는 이여성 조사부장, 박찬희 지방부장이 또한 사임했다.

구속된 8명은 40일간에 걸쳐 혹독한 문초를 받은 끝에, 총독부가 문안을 작성한 소위 서약서를 제출하는 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사건의 직접 책임자로 인정된 이길용 현진건 최승만 신낙균 서영호 등 5명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 포함된 내용의 서약에 서명하고 석방되었다.

1.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안 할 것
1. 시말서를 쓸 것
1. 만일에 또 다른 운동이 있을 때에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가중하여 엄벌받을 것을 각오할 것

등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유능한 5명의 기자가 신문계에서 물러났고, 그 밖의 많은 사원이 사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독부의 요구로 본사에서 제출한 사직서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보고서

본사 사원 중 사직원을 제출한 자에 대하여 좌기(左記)와 여(如)히 수리하였으므로 자(玆)에 보고함

쇼와(昭和) 12년 (1937년) 5월 18일

동아일보사 대표 양원모

조선총독부경무국장 전(殿)

기(記)

사 장 송진우 쇼와 11년(1936년) 11월 11일
부 사 장 장덕수 동 12월 20일
영업국장 양원모 동 12월 20일
주 필 김준연 동 8월 28일
편집국장 설의식 동 8월 28일
사회부장 현진건 동 9월 25일
지방부장 박찬희 동 12월 3일
조사부장 이여성 동 12월 10일
잡지부장 최승만 동 9월 25일
사 원 이길용 동 9월 25일
사 원 장용서 동 9월 25일
사진과장 신낙균 동 9월 25일
동 고 원 서영호 동 9월 25일
이상

송진우 사장이 정간 중인 11월 11일자로 사임하면서 양원모 지배인 겸 영업국장을 전무취체역으로 선임해 사장직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 보고문에 양원모가 동아일보사 대표로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양원모는 1937년 6월 2일 정간해제와 동시에 퇴사하였다─편자 주) 1937년 초에는 오랜 해외생활에서 귀국한 장덕수 부사장도 사임해 간부진이 총사퇴함으로써 회사는 일대 공백상태에 빠졌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申樂均

▲ 1899년 4월 13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 1955년 4월 4일 별세
▲ 1915년 인천상업 졸업
▲ 1919년 경성공업 졸업
▲ 23년 경성정칙영어학교 수학
▲ 24년 동양대학 문화학과 수료
▲ 27년 동경사진전문학교 졸업
▲ 27년 서울기독청년회학교 사진과 교수
▲ 34년 동아일보 입사 · 사진과장
▲ 36년 8월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퇴사
▲ 53년 수원북중 교사

□ 사진은 단순한 오락수단이 아니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사진에의 꿈을 펴지 못하고 불운하게 타계한 신낙균은 그의 책 <사진학 개설> 서문에서 사진에 대한 의미심장한 뜻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사진이라는 것은 오락사진, 즉 부유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소일 재료로 여기고 장난거리에 불과한 유희물인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그래서 사진이라고 하면 오락 혹은 유희물이 그 전부라고 인저앟는 경향도 적지않다. ……물론 사진에는 오락적인 취미로 사진을 하는 사람도 잇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진이 갖는 위대한 사실적 방면에 불가결한 점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못하는 것을 필자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예를들어 설명한다면, 오락적인 수렵가가 총으로 조준포획하는 것을 일종의 오락으로 즐기기 때문에 우리가 이 총을 오락기구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그 흑백을 판단, 긍정치 아니할 것은 사실이다. 이 총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적어도 한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는 보호기관의 불가결한 유일한 무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향락적 오락기계라고 단순히 말한다면 사진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실로 미혹천만(迷惑千萬)이다. 이 카메라는 그 렌즈를 향하는 방면에 따라 국가의 안위를 지배하는 주요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은 단순한 오락이나 소일거리가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지배하는 주요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사진론은 다분히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염두해둔 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1920년대에서 3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를 대륙병참기지로 삼기위한 식민지 통치정책으로 전환하려고 하던 때였다. 일선동화(日鮮同化)와 선만일여(鮮滿一如) 등 동화정책이 추진되고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이 극심해 독립의 여망은 점차 멀어지는 듯 했다. 독립의 의지는 점차 거세되어 갔고, 변절자가 속출하고, 친일파들이 앞장서 수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주창한 신낙균의 사진론은 무엇을 뜻한 것인가, 사진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았던 당시대인들에게는 취미나 여가선용을 위한 사진가들에게 주는 충고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안성만세사건’이후 서울로 피신

1917년에서 27년까지의 기간은 신낙균이 사진가로서 성장의 시기에 해당된다. 1899년(고종 36년) 4월 13일 경기도 안성시에서 출생한 신낙균은 1915년 인천관립상업학교를 거쳐 경성관립공업하교 염직과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에게 새롭게 다가선 학문은 화학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은 것처럼 매료되었다. 사진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염직과의 중요한 과목인 화학관계 지식은 후일 사진가로서의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주저인 <사진학개설>의 여러 곳에서 그 시대의 영향을 찾아볼수 있다. 명확한 이론의 전개와 근저에 화학적 지식을 충분히 활요하고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사진이론으로서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사진으로 시작해서 사진을 인생의 목표로 정한 것이라든지 사진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한 것도 공업학교에서의 수학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러나 공업학교를 졸업해서도 사진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서있지 않았다. 공업학교를 졸업한 2년 후,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3.1만세운동은 그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계기로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당시 신낙균의 나이 20세, 서울에 인접한 안성에도 만세운동은 파급되어 경기도 내에서는 수원 다음으로 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안성만세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이용락이 편찬한 <3.1운동실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안성의거는 홍찬섭이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려고 상경하여 체류하던 중 3월 1일 오후 탑골공원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만세함성이 터지자 그 시위대에 뛰어들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조국광복에 몸바치기로 결심하고 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해서 즉시 각 방면의 뜻있는 동지들을 비밀리에 규합, 의거할 것을 결의했다. 야간을 틈타 각 마을에 비밀한 연락을 취하고 거사일과 장소를 결정한 후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 수백장을 작성, 거사준비를 완료했다.
신낙균도 홍찬섭 등과 긴밀한 연락을 맺고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친구 유길준(국내 의학박사 제2호) 등 몇 사람이 사랑방에 모여 밤을 도와 선언서를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3월 29일 수많은 군중이 안성군청 관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 만세함성은 읍내를 진동했다. 연일 계속된 만세시위 군중은 3천에 이르렀다. 일경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로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수많은 사람이 검거되어 126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영어의 몸이 되었다. 검거의 마수를 피한 주동자들은 변장을 하거나 밤을 틈타 피신의 신세가 되었다. 신낙균도 야간을 틈타 서울로 피신하여 간신히 검거를 면했다. 서울에 와서는 매부 정욱진의 집에 은신하여 8개월동안을 숨어살았다. 만세사건도 얼마쯤 잠잠해 지고 활동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자 그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기르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인가 새로운 학문을 배워보겠다는 결심으로 해외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1922년 도쿄의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1년, 동양대학(東洋大學) 문화학과에서 2년간의 수업을 거쳐 도쿄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4년이었다.

□  YMCA 사진과 교수로 후학 양성

신낙균이 도쿄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에 일본에서는 사진발명의 시조인 니에프스를 기념하는 사진발명 백년제가 성황을 이루었다. 사진발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조명되고 1백년간의 사진변천사 등 많은 연구발표와 행사가 이를 계기로 이어졌다. 시기적으로는 사진기술의 개발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일본의 사진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사진재료와 카메라까지도 자급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독자적인 기술개발로 전후의 카메라는 일본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초석을 다지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창작과 사진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27년 도쿄사진전문학교를 졸업, 귀국한 그 해에 바로 기독교청년회학교에 초빙되어 사진과 교수가 되었다. 기독교청년회(YMCA)는 1903년 이상재, 윤치호, 김식, 유성준 등 국내 유지 30여명이 발기인이 되어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발족한 것이 시초였다. YMCA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한시하던 실무교육에 치중했다. 공업부에는 목공, 철공, 기계, 염직, 사진 등 다섯과목을 두고 미국인이 교육을 담당했다. 사진과는 교육연한이 3개월로 이론교육보다는 실기교육에 치중했다.
기독교청년회학교 사진과에서 신낙균이 해야할 일은 사진전반에 관한 체계있는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진발달소사, 사진학 개설, 재료약품학, 채광학, 사진용어 등으로 분류해서 지금까지의 불분명했던 사실들을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즉 사진전래 이후 단편적이고 모호했던 표현방법과 비법으로까지 여겼던 기술적인 것들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 일장기 말소사건은 일제에 대한 마지막 저항

1934년부터 36년은 동아일보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던 시기였다. 34년 사진과장으로 입사할 당시 동아일보는 조석간 발행으로 지령 5천호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3차의 무기정간이 설명하듯 일제의 언론통제에 맞서 필봉을 굽힐 줄 모르던 때였다. 1930년대는 크로 작은 사건들이 쉴사이없이 계속 일어났다. 삼남수해와 같은 엄청난 수해가 해를 거르지 않고 연이어 전국을 휩쓸었고, 여기에 공산당 사건 등 큰 사건들이 계속 이어져 사진부는 영일이 없던 때였다. 이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에는 최복순, 윤필구, 강대석, 백운선, 서영호, 송덕수 등 쟁쟁한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신문사진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도 이때였다. 스트레이트한 사진의 보도도 빛을 발하던 때였지만 화보라는 사진페이지가 큰 사건에 뒤따라 수없이 기획된 것도 이들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탄압과 규제가 끊임없이 뒤따랐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사진을 통한 저항이 사진기자들의 정신속에서 분출되던 해였다.
신낙균이 사진과장으로 재직한 2년 후인 1936년 8월 9일 새벽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를 제패한 뉴스는 온 국민을 환희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했다. 각 신문사는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관련된 기사와 사진으로 연일 특집을 제작했다. 그리고 기념사업과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는데 하루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기념행사를 강제로 막고 손선수의 승리로 파급될 체제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했다. 동아일보도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했으나 일제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지만,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담은 기록영화의 상영을 막지는 않았다. 36년 8월 25일 기록영화의 상영을 하루 앞두고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가 우승대에 서있는 사진을 게재하게 되었다. 아사히신문사로부터 특별히 입수한 손기정 선수의 우승사진으로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동아일보는 제1판에서는 일장기가 부착된 사진 그대로를 게재해 배포했으나 제2판에서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가 사라진 채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이날 오후 동아일보 사진부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의 압수수색으로 팽팽한 긴장에 싸이게 되었다. 일장기말소의 전말에 깊이 관여한 사진부로서는 그때까지 압수와 삭제라는 탄압과는 달리 형사처벌까지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날짜 제2판 신문이 배포되자 곧이어 경기도 경찰부는 발매배포를 금지시키고 고등계 형사들이 신문사에 들이닥쳐 사진부를 제일 먼저 수색하기 시작했다. 가필한 사진과 사진제판의 원판을 압수하는 한편 3층에 있던 제판실에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다시 제판, 일장기가 선명히 나오도록해서 석간신문을 다시 인쇄하도록 했다.
이후부터는 일장기말소사건 관련자들은 경기도 경찰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다음날 8월 26일 장용서, 현진건, 이길용, 이상범, 서영호, 송덕수 등과 함께 신낙균도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연행되어 갔다. 백운선과 함께 경찰부 동일방 유치장에 수감된 신낙균은 보통 오후에 문초실로 끌려나가 수족을 결박당한 채 조사를 받았다. 고등계 형사들은 미리 꾸민 문초요지를 읽어주며 그들의 각본에 맞추려고 갖은 고문을 다했다. 물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격검으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 또 맴돌리기 등 같은 악혁을 다 당하면서 사진수정과 게재경위, 사진수정의 직접지시가 편집국장, 주필, 사장의 지시가 아닌가, 공산당과의 관련 여부, 일장기말소의 목적에 대해 끈질긴 추궁은 계속되었다. 일겨의 잔학한 고문으로 구속된 기자들의 육체는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구속기간까지 연장해 엄청난 음모인 것처럼 조작한 각본은 끝내 입증하지 못했다.
36년 9월 26일 오후 3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오카(岡)모의 일장훈시를 듣고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끌고 지옥같은 감방에서 풀려났다. 몸음 풀려났지만 다시는 신문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1. 언론기관에 일체 참여하지 말 것, 2. 시말서를 쓸 것, 3. 만일에 또다른 운동이 있을 때에는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 받을 것을 각오할 것.
이것은 신낙균 등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과 관련한 기자들이 만 33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석방되면서 서명한 총독부가 작성한 서약서의 내용이었다.

□ 사진에 대한 열정과 꿈을 펴보지 못한채…

37년 9월 동아일보 퇴사 후 해방이후까지느 s사진과 단절된 시기였다.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타의로 물러난 후 그의 행적은 실의와 좌절, 그것이었다. 경기도 여주의 광산에서 잠시 직장을 가졌다. 금광이었기 때문에 있을곳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팔보금광에서의 직장은 길지 못해서 불과 몇 개월만에 그만 두었다. 진남포 대성식산회사에서도 1년여 근무했으나 이때는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1945년 고향 가까운 경기도 수원에서 그는 8.15광복을 맞이한다. 광복은 온 겨레 모두에게 환희와 기쁜을 안겨주었다. 더구나 일제의 탄압속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사람에게는 그 감격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신낙균에게도 그것은 누구보다노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재기를 위해 다시 일어섰다. 인천에 있던 제유공장을 경영하는 행운을 잡앗으나 해방의 혼란 속에 공장시설은 말이 아니었다. 한번도 제대로 가동해보지 못하고 화재까지 일어나 제유공장에 쏟았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25전쟁 후 물욕을 버리고 수원 북중학교의 물리학 강사로 다시 교단에 섰다. 이곳에 있는 동안 때때로 서울의 사진인들과의 교류로 갖게 되고 사진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 대한 열망은 끝내 펴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1955년 4월 4일 수원 북중학교 운동장에서 아침조회 시간에 쓰러진 그는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유병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향년 57세. 한국사진계의 거목은 일제의 강압으로 그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감했다. 사진에 대한 열정과 진실성, 이것은 신낙균의 전 생애를 통해 줄기차게 추구했던 사진가의 정신이었다.

(최인진 동아일보 사진부장, ‘申樂均’,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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