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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동아일보 사람들- 김상기

Posted by 신이 On 10월 - 30 - 2018

 

김상기(金相琪, 1918~2011)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 1996년 고문에서 물러날 때까지 40년을 동아일보와 함께했다. 1963년 4월 동아방송 개국과 함께 초대방송국장으로서 방송을 진두지휘하고 1974년 2월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때 경영합리화조치에 의해 회사를 떠났다. 다음해 재입사한 뒤 1981년 2월부터 1983년 2월까지 동아일보 사장, 1983년 2월부터 1989년 3월까지 동아일보 회장을 지냈다. 김상기는 1981년 3월 2일 사장 취임사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현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는 영광의 좌석이 아니라 고난의 자리임을 잘 알고 있다”며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은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고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김상기(金相琪) (서울, 1918~ ) ▲ 57.11 출판부장, 업무국장 광고부장 겸, 방송국장, 이사, 출판국장 겸, 상무이사, 방송국장, 전무이사, 부사장 방송국장 겸, 74. 2 퇴사. ▲ 75. 3 재입사, 상임감사, 부회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동아방송의 개국

1961년말부터 1963년초에 걸쳐 건축공사와 방송시설을 준비하고, 시험전파를 성공리에 끝낸 동아방송은 개국을 목전에 두고 인적구성에 착수하였다. 국의 기구는 3부 6과 2실 1소로 다음과 같다.

초대 국장에 김상기(金相琪) 업무국장이 전보되었고, 방송부장에 최창봉(崔彰鳳), 기술부장에 신광우(申光雨), 업무부장에 정봉진(鄭奉鎭), 그리고 편성과장에 이윤하(李潤夏), 제작과장에 조동화(趙東華), 음악과장에 조갑준(趙甲濬), 아나운서실장에 전영우(全英雨), 뉴스실장에 고재언(高在彦), 송신소장에 이창섭(李昌燮), 기술과장에 정관영(鄭寬永), 총무과장에 김기택(金基澤), 영업과장에 강기철(姜基喆)이 각각 임명되었다.

(…)

64년 7월의 제38기 정기주총은 이사의 개선을 보았는데 이희승 고재욱 김상만 김승문이 재선되고 김준연 고광표 두 이사가 물러 났으며 신형식(申亨植) 김두일(金斗溢) 이언진(李彦鎭) 김상기(金相琪) 우승규(禹昇圭)가 새로 선출되었다. 9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7월 31일, 대표이사 사장에 이희승, 부사장에 고재욱, 전무이사에 김상만, 상무이사에 신형식을 선출하였다. 감사에는 양원모 고광표가 선출되었다.

(…)

이어 65년 12월의 이사회는 김상만전무를 부사장에, 김두일 총무국장 이언진 공무국장 김상기 출판국장을 각각 상무이사에, 천관우 편집국장과 이동욱 논설위원을 이사로 선임하여 각각 주필과 상임정책위원을 위촉하였고, 우승규 이사겸 논설위원실장을 편집고문에, 그리고 변영권 편집국장대리를 편집국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65년 2월에는 이사겸 방송국장 김상기가 출판국장으로 전보되었고, 후임 방송국장에 업무국장 조병윤이 전임되었으며, 후임 업무국장에는 총무국 서무부장 정봉진이 발탁되었다.

66년에 들어서 3월 14일에는 조사기획위원 권오철이 부국장대우로서 편집국 조사부장으로 전임되고, 부국장대우로서 방송뉴스를 담당하던 이동수와 사회부 및 지방부를 담당하던 이혜복이 서로 ‘담당’을 교체하였으며, 편집부국장대우 정리·교정담당 임순묵과 심의위원 구연묵이 자리를 맞바꿨다.

(…)

4월 1일에는 총무국 사업부장 윤현배가 부국장대우로 승진하였고, 같은 일자로 심의실장 김영상과 논설위원 박권상이 상임정책위원을 겸임하였으며 촉탁논설위원 오병헌이 방송뉴스 해설주간을 겸하게 되었다. 9월 16일에는 정치부차장 권오기가 논설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7월말 제40기 주총에서는 김승문 우승규 두 이사와 양원모 감사가 정년으로 퇴진하고, 김상협이 감사에 피임되었다. 이때 김상기 상무겸 출판국장이 방송국장으로 전임되어 방송과 업무담당 상무로, 김두일 상무겸 총무국장이 총무와 출판담당 상무로 각각 위촉되고, 출판국장에는 조병윤 방송국장이 전임되었다.

(…)

청중수에 관련, 김상기·김성열이 연행되다

5.3대통령 선거전에서 박·윤 두 후보간의 유세전의 성패는 63년의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두 후보의 인기를 가늠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양측 모두 청중동원에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화당의 경우, 시·군·면·동·리·반의 장을 기본으로 하는 행정조직 및 지역말단까지 침투된 당조직이 있었고, 이 조직이 물 쓰듯한 선거자금으로 순조롭게 가동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경우 거꾸로 행정조직에 눌렸고 관권의 음성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서로 앙숙의 사이였던 민중·신한 양당이 선거 3개월 전에 인위적으로 급조 통합하였으므로 하부까지 능률적인 단일조직이 되지 못하였다. 다분히 선전전, 이른바 선전‘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흔히‘야당지’로 불리우는 본보는 초연한 독립적 입장을 취하려 노력했다. 또한 야당과 야당후보는 적절한 이슈를 제기하여 여당후보를 궁지로 몰아넣어야 했는데, 순전한 정책대결의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대안제시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야당의 열세는 박·윤 두 후보의 대도시 유세에 동원한 청중수에도 반영되었고, 특히 여당의 경우 선거전 초반에 공화당이 시골청중을 트럭으로 강제동원하여 유세장으로 인도하다가 트럭이 전복되어 다수 인명피해도 생겼고, 박정희의 유세장에 동원된 청중을 위해 임시열차가 운행되는 비리도 있었으며, 군 병력이 동원되어 연설장을 닦는 부조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박은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 대도시에서 윤보다 많은 청중을 동원할 수 있었고, 서울유세에서도 박과 윤이 약25만씩 비슷한 청중을 끌어 모았다. 청중수의 보도는 신문마다 모두 달랐고 특히 정부계 신문은 황당무계한 숫자를 보도하였는데 본보의 경우, ‘선거보도지침’에 따라 청중수는 가능한 한 정확을 기하고 반드시 장소의 넓이와 밀집의 정도를 추정인원수와 더불어 보도했다(예 3천평의 운동장을 빈틈없이 메운 3천군중). 이 원칙에 따라 신중을 기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원칙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본보는 여·야유세가 시작되기 전에 정치부 사회부 뉴스부 등 기자 혼성팀을 유세현장에 보내 먼저 유세장의 넓이를 측정하고 지역을 분담하여 유세가 시작되면 청중의 밀도를 계산하고, 이를 종합집계하여 청중수를 추정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장소의 넓이만 해도 학교교정의 경우는 사전에 학교당국에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유세장으로 쓰인 대구의 수성천변이나 서울의 남산공원 또는 장충단 공원 등은 청중이 모여든 장소의 넓이를 책정하는 작업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서울의 경우 윤보선은 4월 22일 남산공원에서 유세를 가졌다. 본보는 김성열 국장대리 및 이동수 방송뉴스 담당 부국장 이하 다수기자가 유세를 관찰하였고, 본보가 정한 요령에 따라 청중수 25만이라는 숫자를 추정하여 이를 방송과 신문에 보도하였다. 주최측은 남산공원 일대를 뒤덮은 인파를 향하여‘백만시민 여러분’하면서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본보 보도에 크게 불만이었다.

1주일 후 박정희의 유세가 장충단 공원에서 실시되었다. 장소가 언덕과 운동장 및 야산으로 한없이 뻗어 있고 야당집회와는 달리 조직적으로 동원된 청중이 널리 산재되어 있어 본보의‘지침’대로 계산하기 쉽지 않았다. 김성열 이하 20여명이 현장에서 청중수 계산에 진땀을 뺐는데, 당초 개산(槪算)은 고작 12,3만으로 나왔다. 그런데 유세취재에 나선 대부분 혈기방장한 젊은 기자들은 대체적으로 반권력성향이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여측 청중수는 적게 보고, 야측 청중수는 크게 보는 경향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12,3만’이라는 잠정집계를 보아야 했다. 이미 서울신문 등 여당측 신문은‘100만 청중’으로 보도한다는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진두지휘한 김성열은 현장에서 고심 끝에 현장취재 중인 간부사원과 중견기자들의 관찰 결과를 종합하다가, 윤보선의 남산집회와 대동소이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따라서 장충동에 모인 공화당 유세인파도‘약25만’으로 추산하였으며, 그대로 보도하였다.

다음날 이른 아침 방송국장직을 맡고 있던 김상기 상무, 김성열 국장대리 및 이동수 방송뉴스 담당 부국장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특정후보를 당선 또는 낙선시킬 목적으로 허위사실(청중수 허위조작)을 유포했다며 선거법 위반혐의를 따진 것이다. 조사결과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론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한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날 오후 모두 석방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선거에 직접 간여, 권력의 힘으로 본보의 보도에 심리적 압박을 가한 뚜렷한 사례의 하나였다.

(…)

69년 10월 3일 방송의 날 기념식에서 본보 방송국장인 상무 김상기는 정부로부터 방송유공 표창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김상기(金相琪) 사장 취임

이동욱 사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언론기업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협격(挾擊)’에 맞서 보다 능동적 대처로 ‘동아부흥의 해’를 다짐했던 본사는 먼저 경영진의 대폭 개편으로 이에 상응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1981년 2월24일 오후에 열린 제55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상만 회장을 명예회장에 추대했으며, 이어 오후에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회장에 이동욱 사장, 대표이사 사장에 김상기 부회장을 선임했다. 이밖에 개편내용을 보면 전무이사 김성열(金聖悅), 상무이사 김기택(金基澤·경리 담당) · 이동수(李東洙·개발사업 담당) · 권오기(權五琦·주필) · 김병관(金炳琯·광고 및 총무 담당), 이사 신용순(申用淳·편집국장) · 김성칠(金星七·공무국장), 비상임이사 오재경(吳在璟) · 현영원(玄永源) · 송갑호(宋甲鎬) · 김상겸(金相謙), 감사 송영수(宋英洙) · 박오학(朴五鶴) 등이다.

15대 김상기 사장은 1918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으로 보성전문을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했다. 1957년 본사에 입사해 출판부장·업무부장·동아방송국장·이사·상무이사·전무이사·부사장을 역임하고 78년에 대표이사 부회장에 선임됐다. 민방협회 이사와 방송윤리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우리나라 방송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3월2일에 열린 사장 이·취임식에서 김사장은 취임사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기로에 당면한 현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는 영광의 좌석이 아니라 바로 고난의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은 한 판의 싸움으로 끝나는 전투가 아니라 그 승부에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궁극의 목표를 향해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한편 이동욱 회장은 사장 퇴임사에서 ‘4년 동안의 재직기간 중 특히 긴급조치와 언론기본법 아래서의 어려움 속에서도 사세에 상당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회상하고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앞으로 예상되는 험난도 일치단결해서 극복해 나가자’고 말했다.

(…)

한편 본사는 본보 창간 62주년 기념식을 4월1일 오전 별관 회의실에서 김상만 명예회장, 이동욱 회장, 김상기 사장을 비롯한 임원과 간부사원 그리고 장기근속 표창자 등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이날 기념식에서 김상기 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동아에서 한국 신문의 귀감을 찾으려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제약에서도 신문의 정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고 ‘동아의 전통을 지키고 국민의 기대에 접근하기 위해서 용기와 지혜를 함께 필요로 하는 언론의 험로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본사는 이달부터 월 구독료를 2천5백원에서 2천7백원으로 올렸다.

한편 ‘미주동아’의 신사옥이 6월24일 준공됐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인 크랜셔 블루버드에서 준공된 새사옥은 대지 4백20여 평에 건평 2백50여 평이었다.

이날 있은 준공기념 리셉션에서 캘리포니아 주의회와 로스앤젤레스의 시의회는 김남(金楠)사장에게 ‘미주동아일보는 한국인 사회의 대변지로서 빠르고 바른 소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공공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해왔다’고 치하하는 내용의 감사장을 전달했다.

(…)

오재경(吳在璟) 사장 취임

본사는 1983년 2월28일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김상만 명예회장을 재추대한 데 이어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회장에 김상기 사장, 대표이사 사장에 오재경 이사를 각각 선임하고 이사 및 감사를 다음과 같이 개선했다.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新任人事] 東亞傳統을 더 빛내자

放送局長 金相琪

지난 4月 25日 동아방송국이 개국함에 즈음하여, 동아일보사의 일원으로서 기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방송엔 전혀 문외한인 본인이 국장이라는 중책을 맡게되어 불안하기만 합니다.

더구나 4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일보의 자매기관으로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층 더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상업방송국으로서 출발하는 동아방송은 현재 여러면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근 40년의 역사를 가진 관영방송과 그밖에도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몇몇 민간방송이 포진하고 있는 방송계에 뚫고 들어가야 할 동아방송은 앞으로 두가지 큰 목적을 두고 노력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동아의 청취자를 개척확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수한 방송을 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스폰서를 개척확보 해야 한다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목표는 어느 상업방송국이고 같은 목표가 되겠지만 DBS의 경우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남보다 늦게 출발했다는 점에서 그 목표달성을 위하여 보다 많은 노력과 각오가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앞에 말한 두가지 목표가 병행되어 이루어진다면 이상적이겠으나 이두가지 목표의 서열을 굳이 매긴다면 우선 청취자의 개척확보에 힘을 써야 되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이 첫째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다음의 목표는 쉽게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청취자의 개척확보라 하겠는데 이것은 보험회사에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업무활동을 하는 식의 방법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청취자 스스로가 동아방송을 선택하게끔 해야겠고, 동아방송을 신임하게끔 해야겠고, 또한 동아방송과 친근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놔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동아방송은 여러가지 난관과 애로를 무릅쓰고 개국한지 불과 20일만인 지난 5월 20일을 기해 전시간(하루 19시간) 방송을 단행했고 지난 6월 10일부터는 개국당시의 기본편성을 대폭 개편하여 새로운 기본편성에 의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동아방송은 그 모체인 동아일보라는 배경과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동아방송의 출발이 동아방송 안의 첫 출발이 아니라 동아일보사의 새 출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동아일보사 전체가 동아방송의 육성발전에 전심(全心)을 기울여 주어야 동아의 전통은 더욱 빛나게 되며 동아의 새 출발은 찬란(燦爛)한 것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상기, ‘新任人事-東亞傳統을 더 빛내자’, 東友, 1963년 6월호)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 사장 김상기 씨

동아일보사는 지난 2월 24일 열린 제55기 정기주주총회를 계기로 이사진을 크게 개편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눈을 끄는 것이 그동안 경영의 뒷자리에 隱居(?)하고 있던 김상기(63) 부사장이 대표이사 사장으로 전면에 나타나고 실력자(?)였던 김상만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은 것이었다.

동아일보로 볼때 지난 70년대는 창간이후 가장 파란이 많았던 10년이었고 이 파란과정에서 가장 각광을 받게된 것이 김상만 회장이었다. 안팎을 막론하고 동아일보하면 김상만 회장을 연상하게 됐다. 그러므로 김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앉고 바로 손아래 동생인 김상기 씨가 사장에 취임한 사실은 세대교체의 인상을 주기도 하나 신임 김사장은 대소사를 형인 김 명예회장과 상의해서 처리해 나가겠다고 재삼 강조하고 있다.

김 사장은 형인 惜村(김상만 명예회장의 号)에 비해서 성격이 개방적이고 매사에 빨리 매듭을 짓는 편이다.

김 사장은 1918년 4월 14일 전북 부안에서 仁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전이요, 仁村이 중앙중학교를 궤도에 올려놓은 바로 그해였다. 김 사장은 仁村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나중에 仁村의 명령으로 중앙중학으로 전학해야 했지만 부친의 외유로 부재중에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학)에 입학했었다. 중앙을 졸업한 김 사장은 역시 仁村이 운영하던 보성전문 상과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를 졸업했다. 그 때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1년 12월이었다.

와세다를 나온 김 사장은 한때 한성은행에 근무한 일도 있고 해방 후에는 친구들과 무역 또는 綿業에 한동안 종사하기도 했으나 仁村이 서거한 2년 후인 57년 가을 총판부장으로 동아일보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24년간 김 사장은 동아일보를 떠난 일이 없다. 업부국장, 출판국장, 동아방송국장, 상무이사, 전무이사를 거쳐 72년에 부사장, 77년부터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星霜을 東亞와 苦樂을 같이 했다.

김 사장은 특히 63년 4월 동아방송을 개설 할 때 초대국장으로 그 산파역을 맡았고, 74년 이 자리를 그만둘때까지 11년간 동아방송을 키우고 발전시킨 숨은 공로자였다.

따라서 작년 12월 동아방송이 방송공영화 방침에 따라 KBS에 흡수되었을 때 김 사장의 감회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만하다.

우연히도 ‘새시대’의 개막과 같은때 중책을 맡게된 김 사장은 ‘새시대’가 동아일보의 발전에 반드시 밝은 전망을 약속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장 취임을 사양도 했었다. 그러나 김상만 회장이 뒤로 물러앉은 지금 누군가가 仁村의 遺業을 계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김 사장은 이 책임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취임사에서 말하고 있다.

김 사장 역시 惜村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신중해서 동아일보의 경영이나 편집에 급격한 방향전환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 사장은 가능하면 간부들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해서 소신껏 일하게 하고 자신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에 만족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어 새로운 경영체제를 갖추게 된 동아일보의 오케스트라가 앞으로 새 지휘자를 맞아 어떤 음악을 내보낼 것인지 기대된다.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 사장 김상기 씨‘, 신문과방송, 1981년 3월호)

 

 

김상기 전 동아일보 회장 별세

김상기 전 동아일보 회장이 지난 7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18년 전북 고창군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서울중앙고와 보성전문학교 상과,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를 졸업하고 195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63년 동아방송 국장, 1972년 동아일보 부사장, 1981년 사장, 1983년 회장을 지내며 신문경영 일선에서 민주언론의 창달에 이바지했었다.

김 전 회장은 1981년 3월 2일 사장 취임사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현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장 자리는 영광의 좌석이 아니라 고난의 자리임을 잘 알고 있다”며 “언론 자유를 위한 투쟁은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지구전이기 때문에 동아의 과거가 그랬듯,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꾸준하고 의연하게 전진해 나가자”고 민주주의를 향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또 김 전 회장은 1981년 여의도 사옥에 ‘동아문화센터’를 개설, 평생교육의 장을 열었으며 1984년에는 ‘음악동아’ ‘월간 멋’ 등 2개의 월간지를 창간하여 저널리즘의 영역을 확장했고 창간호에 ‘지휘봉의 제왕 카라얀’과 ‘윤이상 스페셜 인터뷰’ 등을 실어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의 사세 확장에도 힘을 쏟은 김 전 회장은 1981년 신년호부터 12면에서 16면으로 증면했고 발행부수도 증가해 1984년 한국 일간신문 사상 최초로 150만부를 돌파,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신문으로 입지를 굳혔으며 민간방송협회 이사와 방송윤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방송문화발전에도 기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종숙 씨와 장남 병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고려대 정치외교학 전공 교수) 차남 병표(주원 대표이사) 딸 창원 영원 효신 씨 등 2남 3녀, 사위 이종훈(개인사업) 이민교 씨(변호사) 며느리 주영아 신준희 씨가 있다.

(‘김상기 전 동아일보 회장 별세’, 동우회보, 2011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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