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협(金光協, 1941~1993)은 196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詩)부문에 ‘강설기(降雪期)’가 당선돼 등단했고 같은해 2월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서울대 사대 재학시절 문학회장과 신문편집장 등으로 일했으며 이는 평생의 시작업과 30년 가까운 언론계 활동으로 이어졌다. 52세의 나이로 별세했을 때 그는 동아일보 조사연구실 편집위원이었고 그의 부음기사는 그가 평소 “알기 쉬운 시를 써서 시인 아닌 누구 한사람이라도 읽어 즐겁게 하고 사회에 이바지 해야한다”는 시론을 펼쳐왔다고 적었다.
김광협(金光協) (제주, 1941~ ) △ 65.2 수습(편집국), 기자(월간부, 사회부, 지방부), 문화부차장, 편집위원, 연구실 심의위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4권, 동아일보사, 1990)
본사(本社)두 기자에 뭇매
연대 데모 취재중에
경찰봉이 부러지도록
22일 오후 연세대학생 데모현장에서 취재하던 본사 방송 뉴스부 김일수(27) 김광협(24) 두 기자는 10여명의 기동경찰과 무술경관들에게 경찰봉이 부러지도록 뭇매를 맞고 심한상처를 입었다.
이날 오후 5시반쯤 아현동 로타리에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코피를 흘리며 경관1명에게 연행돼가는 이일용(20세가량·아현동)씨를 발견한 이들 두 기자는 녹음기의 마이크를 갖다대면서 “이름이뭐냐?” “주소는?”하고 이씨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때 “기자××죽여라”고 고함을 치면서 방독면,경찰봉,방석모로 무장한 기동경찰과 무술경관 10여명이 달려들어 취재하던 두 기자를 구둣발로 차고 팔을 비틀며 머리를 경찰봉으로 후려치는등 폭행을 가했다. 이로인해 김일수기자는 우측하지피하일혈(右側下肢皮下溢血)로 전치 5일, 김광협기자는 두부피하혈종(頭部皮下血腫)으로 전치 4일의 심한 상처를 입었다.
경찰은 이들 두 기자가 DBS라고 쓴 녹음기를 들어보이며 취재기자의 신분을 명백히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때렸고,오히려 녹음기의 마이크를 잡고…(후략)
(동아일보 1965년 6월 29일자 7면)
김광협은 1964년 「冰河를 위한 시」라는 작품으로『新世界』誌 시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강설기(降雪期)」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이후 그는 시집 6권과 시선집 2권, 번역시집 2권, 번역서 1권 등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1974년 현대문학상, 1981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중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시집 『農民』은 1970~1980년대 민족문학의 주요 흐름으로 부각되었던 농민문학의 텍스트로서도 시사적 이의를 지닌다. 또한, 제5시집 『돌할으방 어디 감수광』은 외지인들에게 생소하기 그지없는 제주어로 쓰여 있어서 그 강골의 결단력을 짐작게 한다. 제주어는 외지인들에게 있어서 불통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그것을 매개로 하여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소통을 버리고 포기한 대가로서 불통을 얻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것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는 행위이다. 그에게는 고향의 제주인들 역시 그가 껴안아야 할 민중이며 농민이었다.
김광협은 시인뿐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도 다소 특이한 이력을 보여준다. 동아일보사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여러 필화사건에 휘말림으로써 정보부의 감시 속에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66년 『靑脈』誌에 「大統1에게」, 「국립 서울大學校」, 隨想「월남전 덕분」을 발표하고, ‘청년문학가협회’ 권익 옹호 간사 활동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容共이라는 혐의로 1968년 중앙정보부에 불법 체포되어 구금, 기소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가 작성한 弊習시리즈 기획기사의 내용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김지연 제주대 강사, ‘김광협 시에 관한 생태적 고찰- `降雪期`를 중심으로’, 어문론총 제59호, 2013년 12월)
분뇨차 타고 귀가
술에 얽힌 얘기에서 나와 동기생으로 시인이자 문화부 명기자였던 김광협 기자를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겐 별명도 많았는데 큼지막한 코가 얼굴의 부속기관이 아니라 독립가옥 같다고 해서‘별당’‘별채’, 또는 제주도 남자라고 해서‘제남’등이 붙여졌다.
그는 365일 술을 마셨다. 일이 끝나고 술 마시러 가기 전 그에겐 우선 간단한 의식이 있었다. 신문사 근처 구멍가게부터 들러 맥주 글라스와 소주, 맥주, 도라지 위스키 등을 한 병씩 달라고 한다.
이 술들을 글라스에 조금씩 따라 한데 섞는다. 그리고 쭉 들이켰다. 함께 간 그날의 술친구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한다. 무슨 뜻인고 하니, 오늘 저녁은 대개 이런이런 술들이 들어갈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하고 자신의 뱃속에 사전 예고하는 것이다. ‘별당’의 술버릇은 이 집에서 한잔, 저집에서 한잔 식으로 하루 저녁에도 여러 집을 순례했는데,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쉬운 듯 끝냈다.
그가 박석고개 넘어 살 때였다. 무악재 넘어 홍제동 네거리에 이르기전에 골목길마다 대개 포장마차가 있었다. 별당은 이 포장마차에서 한잔, 그 다음 포장마차에서 한잔 식으로 옮겨가며 마셨다. 돈이 떨어졌을 땐 물론 외상이었다. 그런데 월급날 외상을 갚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외상값이라야 몇천원으로 한꺼번에 다 갚을 수 있는 액수였지만 별당은 결코 다 갚는법이 없었다. 한 집에 1,000원 또는 500원이라도 남겨놓았다. 또 들르겠다는 뜻이었고, 포장마차 아줌마들도 별당 식을 싫어하지 않았다.
별당은 포장마차 순례를 마치면 홍제동 네거리 조그만 재래시장 안의 좌판 순댓집을 거쳐 마지막이 네거리 막 지나 있던‘폭포수홀’맥줏집이었다. 그리고 박석고개를 넘어갔다. 별당이 강남으로 집을 옮긴 후엔 순천향병원 앞 술집들을 거쳐 신사동 네거리 포장마차 집이, 적어도 나와 김담구 기자가 선발되어 따라간 피날레 술집이었다.
그 시간도 벌써 자정이 훨씬 넘었는데 별당에겐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신사동 네거리 포장마차에서 음정과는 상관없는 투박한 목소리로 ‘아~ 으악새’를 불러대는 것이었다. 시멘트 바닥을 그 억센 구둣발로 치며 장단까지 맞춰댔다. 그 시각이 오전 2시쯤. 여기서 술집은 끝났지만 다시 우리를 이끌고 그 아래 설렁탕집으로 내려가 설렁탕 국물에 해장술을 하고서야 그는 집으로 향했다. 이런 판이니 아침에 출근하면 속을 달래기 위해 책상에 박카스 사이다 비타민C 등 대여섯 가지를 차려놓고 차례로 마신 다음, 그래도 안되면 마지막으로 멘소래담을 양 눈꺼풀 위에 찍어 발랐다.
별당의 압권은 역시 분뇨차를 타고 귀가한 얘기다. 그날도 세종로 일대에서 기분 좋게 한잔 걸친 것까진 좋았는데 그만 통금시간이 넘어버렸다. 집에 들어갈 방법이 막막하던 차에 마침 신문사 근처에 있던 분뇨차를 발견하고“저거다!”하고 아이디어가 번쩍 했다. 당시 분뇨차는 미관상 자정을 넘어 활동하도록 했으며, 통금도 무소불위였던 것이다. 그는 곧 분뇨차를 전세냈고, 운전석 옆에 앉아 당당히 박석고개를 넘어갔다.
그가 수습기자 시절, 녹음기를 들고 대학생 데모 취재를 나갔다가 경찰봉에 맞아 부러진 경찰봉을 증거물로 가슴에 품고 들어왔던 얘기는 유명하다.
(문명호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묻혀두기 아까운 얘기들’, 관훈저널 2004년 9월 통권 92호, 102~1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