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백성의 정부 세우다
“우리 겨레들의 동아에 대한 기대와 성원은 지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으며 외국기관 또는 외국인 역시 동아를 마치 한민족의 대표기관처럼 대접해 주었었다. 시베리아로부터 철병해가는 미국 군인들이 미쳐 쓰지 않은 의료품들을 원산 등지의 의료기관에 기증하고 갈 때 동아일보의 영수증을 받아간 것은 작은 일이지만 당시의 동아일보의 지위를 말해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김동성金東成 동아일보 창간기자)
“창간 당시 나는 연소年少하였으나 동아일보가 2000만 민중의 절대적 성원으로 탄생되었으니만치 당시의 기세야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각 방면의 지사들이 한 자리에 앉게 되니 한 개의 언론기관이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어떠한 절대 기관이라는 것이 더 타당했다.”
(유광렬 동아일보 창간기자)
“만주로 망명한 후 나는 주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지도 아래 재만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전위로 활약했다. 그 당시 우리 민족 운동가들에게 인촌 선생이 이끄는 동아일보는 마음의 안식처요, 우리를 음양으로 돌봐주는 후견인이었다. 동아일보가 있기에 우리 민족도 할 말을 하고 살 수 있고, 답답할 때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이강훈李康勳 전 광복회장)
“형태 없는 정부의 역할을 해냈다”(최준崔埈 전 중앙대 교수)
“그 당시에는 동아일보를 조선의 정부로 생각했었다.”(김준엽金俊燁 전 고려대총장)
“김성수 씨는 그때까지는 교육 사업에만 전심해서 그 때 중앙학교를 경영했고 그 후에도 전문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만 전심하려고 하는 분인데 여러 동지들이 모두 권하기를 학교도 급하지만 이것은 당장 급한 일이니 또 마침 관청이 민간신문을 한두 개 허락한다는 틈에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고했어요. 김성수 씨는 주저하고 내가 신문에 생소하고 뿐더러 그러자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로 준비가 있어야 될 텐데 간단하지 않다고 사양했지요. 그 때 어떤 이가 권했느냐하면 신문계의 대선배라고 할 유근 선생 또 당시엔 젊었지만 신문계에서 이름 있는, 다시 말하면 편집 경험이 있는 이상협 씨가 있습니다. 이 분들이 권유하고 내가 다소 중간에서 심부름한 셈이지요.
김성수 씨에게 설명도 해드리고 요새로 말하면 사업계획서 같은 것도 이상협 씨가 만들어온 것을 말해 드렸지요. 그래가지고 매일 저녁같이 그 얘기를 해서 결국 김성수 씨도 솔깃해졌어요. 그러면 좌우간 힘 좀 쓰겠다고 해서 창간을 발기하기로 정한 것입니다. 총독부에 발행인 겸 편집인에 이상협李相協, 인쇄인에 이용문李容文 씨 명의로 기미년 10월에 허가신청을 냈는데 그 허가가 그 이듬해인 1920년 1월에 나왔습니다.”
(최두선崔斗善 전 동아일보 사장, 전 국무총리)
이상협李相協 창간 당시 편집국장은 “신문 사업이란 방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당시 가장 신망이 두텁던 신인 교육가인 김성수씨를 가장 유력한 투자가로 생각하였다. 그래 교섭을 벌였는데 첫 번째 회답은 새로 시작한 교육사업 때문에 어렵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를 놓치면 또다시 좋은 사람을 얻기가 매우 힘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직장까지 버리고 나섰던 몸으로 그저 앉아만 있을 수는 없어 동분서주해 가면서도 또다시 그에게 재고할 것을 요청했던바 뜻밖에도 신문 사업에 나서겠다는 김성수 씨 측의 회답回報을 받아 용기백배하여 동아일보 창간에 노력했던 것이다. 인촌의 협력과 투자가 없었던들 신문 창간은 결코 평탄치는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경성방직 창립 준비가 끝나갈 무렵 동아일보 창간 준비도 착수됐다. 이 일이 시작되자 양기탁 선생이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씨의 중형인 장덕준張德俊 선생은 계동 인촌 댁에서 나와 숙식을 함께하며 일했다. 결핵을 앓고 있던 장덕준 선생은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다 길에서 각혈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립을 위한 목록견서도 내가 쓰게 되었다.”
(이희승 국어학자, 전 동아일보 사장)
그러나 일제는 “매일매일 차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문을 어째서 허가한 것인가라고 하여 그 비판의 목소리는 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고이소 내각의 서기관장 다나카 다케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는 백범 선생의 모친이 동아일보를 찾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신 모친께서는 네 살이 채 안된 신信이를 데리고 귀국의 길을 떠나셨다.
모친께 입국 시에 여비를 넉넉히 드리지 못해 겨우 인천에 상륙했는데 여비가 모자랐다. 떠나실 때 그런 말씀을 드린 바도 없었는데, 인천 동아일보 지국에 가셔서 말씀하니 그 지국에서는 상해 소식으로 신문에 난 것을 보고 벌써 알았다며 경성 갈 노비와 차표를 사서 드렸다.
경성 동아일보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한다.”
(이만열李萬烈 옮김, 서울, 역민사, 1997년, 329쪽)
신용하愼鏞廈 교수는 ‘새로 쓰는 한국문화 10, 백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서 “여사는 극빈 속에서 둘째 손자를 영양실조로 잃을까 우려한 나머지 친척의 도움을 받기 위해 상해에서 귀국했다. 아들 백범은 인천까지의 뱃삯을 겨우 마련해 드리면서, 인천에서는 고향의 부호 친구에게 전화해 마중 나오면 따라가고 나오지 않으면 이모 댁을 찾아가시라고 했다. 곽 여사는 인천에 내려 아들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일제가 무서워 나오지 않았다. 곽 여사는 망설이다가 이모 집으로 가지 않고 대담하게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갔더니 서울 갈 차표와 여비를 주었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갔더니 황해도 고향까지의 여비와 차표를 주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모친은 왜 동아일보를 찾아 갔을까요? 동아일보를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자 2면에는 ‘기박한 생애에 남다른 뜻 가진 상해 객창의 김구 씨 모친’, ‘죽어도 고국강산’이란 기사가 있습니다.
.상해림시정부 김구金九씨의 모친 곽락원郭樂園 녀사는 오늘날까지 아들과 함께 파란중첩한 생활을 하여 오며 지금으로부터 약 사년 전에 그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을 떠나 며느리와 손자들을 다리고 아들 김구 씨가 잇는 상해로 건너와서 인정풍물이 모다 생소한 이역타관에서 하로가튼 분투의 생활을 하여 오든 중 지금으로 약 이년 전에는 가치 고생사리를 하여오든 그의 자부子婦인 김구 씨의 안해가 불행히 병마에 걸리어 이역강산에서 황천의 길을 먼저 떠나가게 되매 곽씨 부인은 타관에서 현숙하든 며느리를 일허버리고 눈물마를 날이 업시 오즉 죽은 며느리의 소생인 여섯 살 된 손자와 두 살 된 손자를 다리고 눈물로 세월을 지내다가
.근일에는 다시 고국생각이 간절하다고 그 아들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도라가고저 준비 중이라는데 상해에 잇는 여러 사람들이 고국에는 갓가운 친척도 한사람 업는데 늙으신 이가 그대로 나아가면 엇더케 하느냐고 만류하나 도모지 듯지 아니하고 백골이나 고국강산에 뭇치겟다고 하며 아조 상해를 떠나기로 작뎡하엿다는데 아들의 만류함도 듯지 아니하야 할 수가 업다하며 그 부인은 조선에 나간대도 갈 곳이 업습으로 그의 압길이 매우 암단하다고 일반은 매우 근심하는 중이라.
<윤치호 일기>의 기록에서
1923년 11월 4일 일요일
최남선 군이 10시 30분쯤 찾아와 1시간 30분 동안이나 시대일보를 발행할 수 있게 현금 3만원을 대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는 요즈음 자금시장이 얼마나 경색되어 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그는 자기의 요구를 되풀이했다.
최 군이 신문을 발행해 이윤을 남기는 데 실패할 게 뻔하다. 그가 동아일보를 능가하는 반일적 논조를 펴는 걸 일본인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반일적인 논조에서 동아일보에 뒤쳐지면, 조선인들은 그의 신문을 성원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가 동아일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발행부수 면에서 동아일보를 누르지는 못할 것이다.
1940년 7월 31일 수요일
김종찬의 말로는, 1~2일전 두 명의 조선인 청년이 자기를 찾아와 오는 8월 10일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다고 말하더란다. 이 청년들은 방바닥을 땅땅 내리치면서 ‘아이고 아이고’하며 소리 내 울더란다.
1940년 8월 11일 일요일
어제 저녁 조선의 두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호를 발행했다.
두 신문의 폐간으로 조선인들이 깊은 상처를 받을 게 틀림없다.
(김상태 편역, 2001년, 역사비평사)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나도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비밀련락을 자주 다녔다. 언제인가는 포평주재소에 갇힌 애국자들에게 옷과 음식을 차입해준 적도 있다.
내가 제일 많이 다닌 집은 우편물위탁소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 잡지들을 비롯하여 조선에서 발간되는 출판물들을 그 집에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형권 삼촌의 이름으로 동아일보 지국을 맡아 보았는데 수입은 따로 없었지만 신문은 그저 얻어 볼 수 있었다.(1권 65~66쪽)
내가 조국으로 돌아온 그 해(1923년)는 평양지방에 전염병까지 퍼지어 시민들이 모진 고통을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은 온 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곤란을 당하였다. 동아일보는 그 해 홍수로 인한 참상을 전하면서 평양시내 총호수의 절반에 달하는 1만여호의 집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였다.(1권 90쪽)
나는 그 때(1930년 6월) 카륜에 가서 진명학교 교원들인 류영선과 장소봉의 집에 숙소를 정하였다. 장소봉은 진명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아일보 지국장의 일도 겸하여 보았다.…장소봉은 조선혁명군이 조직된 후 무기를 구입하려고 장춘에 나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하였다. 한 때는 나에 대한 귀순공작에도 동원되었다고 한다.(2권 36쪽)
나는 이러한 과제를 간도 로정의 첫 단계 사업목표로 정하고 동만으로 가는 걸음을 다그쳤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고유수에서 대중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고 류봉화 최득영과 함께 장춘으로 나가다가 밀정의 고발로 반동 군벌당국에 체포되었다.(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자 2면 보도)…장춘으로 이송되어 20일가량 감옥생활을 하였다. 내 생애에서의 세 번째 감옥살이였다.(2권 199~200쪽)
나도 길림시절에 조선일보 지상에서 (인용자 주-동아일보의 잘못,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자 2면 보도) 간디의 편지를 읽고 박소심과 함께 무저항주의를 론평한 적이 있다. 그 편지의 원문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았나이다. 내가 보낼 유일한 부탁은 절대로 참되고 무저항적인 수단으로 조선이 조선의 것으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1926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에서.(4권 113쪽)
우리가 서간도로 진출하고 있을 무렵에 국내에서는 일장기말소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 그 소식이 백두산 밑에 까지 날아왔다.
이 사건의 발단으로 된 것은 신문 동아일보가 1936년 8월에 베를린에서 있은 여름철 올림픽 경기대회 마라손 종목의 1등 수상자인 손기정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의 앞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였다. 노발대발한 총독부 당국은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을 내리고 그 관계자를 구금하였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손기정의 경기 성과와 일장기말소사건을 소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우리 부대의 모든 대원들은 강연을 듣고 동아일보 편집집단이 취한 애국애족적인 립장과 용단에 열렬한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였다.(5권 56쪽)
해와 달도 빛을 잃어가던 조국 땅에 있어서 보천보 밤하늘에 타오른 불길은 민족의 재생을 요구하는 서광이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성일보를 비롯한 국내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인상적인 표제를 달고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전하였다.(5권 176쪽)
1938년 말에 동아일보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적색연구회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혐의로 그 연루자들이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공화국의 초대 교육상이었던 백남운도 적색연구회의 조직 성원이었습니다.(8권 394쪽)
인촌이 만든 동아일보는 어떤 성격의 신문이었느냐? 천관우千寬宇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3·1운동에서 많은 민중들이 피를 흘려서 싸운 그 피의 대가로서 동아일보가 생겼습니다. 동아일보는 그 정신에 있어서 3.1운동의 계승, 발전체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의 민중이 자발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찍어내던 민족의 지하비밀신문의 전통을 이은 것이 동아일보입니다. 인촌 선생께서 동아일보를 창간할 때 유근 선생과 양기탁 선생, 두 신문 원로를 편집감독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두 분이 없다고 신문이 안 되는 것은 아닌데 왜 이 두 분을 모셨느냐? 이 문제는 그저 간단히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청년 기자들이 무언중에서도 이 원로 두 분에게서 어떤 정신적 영향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깊은 배려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아일보가 구 왕조 말에 열렬했던 민족지인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의 그 전통을 이어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무언의 결의가 아닌가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도 물론 인촌 선생의 깊은 뜻이 다 숨어있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창간 당시 기자로 계셨던 고故 김동성金東成 선생께서 이런 글을 남기시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그때 만세 직후가 되어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 있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에 들어온 사람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어왔다기보다는, 남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나는 편히 앉아서 신문을 만든다, 그래 이것 가지고 무엇이 괴롭다고 하겠느냐, 이런 신조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동아일보였고 말하자면 13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지들이 자연히 모인 곳이 동아일보였다.’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창간 당시의 지국장 간부를 보면 부산의 안희제安熙濟 선생, 평양의 이덕환李德煥 선생 등은 당시로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대표적인 민족운동가들 입니다.
이분들이 모두 지국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그 후에도 연면히 계속됩니다. 가령 대구의 서상일徐相日 선생, 평양의 김성업金性業 선생 등이 모두 당당한 민족운동의 대표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8·15해방까지 10년, 20년을 그저 지국장으로서 일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40년에 동아일보가 폐간 당할 때, 일본 경찰은 동아일보가 전국 각지 지국망을 통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서 상해임시정부로 보내지 않느냐고 트집을 잡아 고초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인촌 선생을 정점으로 해서 동아일보의 인적 구성이 얼마만큼 민족대변기관다운 그런 구성이었던가를 단적으로 시사해주는 에피소드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인촌 선생은 동아일보 창설자이고 또 사주이신데도 동아일보 사장으로 계시던 기간은 불과 얼마 안 됩니다. 자신이 직접 책임을 맡지 않을 수 없는 비상시의 사태일 경우를 내놓고는 모두 자기의 친우이며 동지인 여러 선생들에게 경영을 일임하셨던 일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입니다. 지금 고려대학교 교정에 인촌 선생의 묘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생은 언제나 적재를 앞세워 적소에 나가도록 하고 자신은 겸허와 성실로 순결함을 낙으로 삼았으니 대인 품이 자기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로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 수난의 역사가 동아일보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촌 선생이 믿고 맡기신 그 친구 되시며 또 동지 되시는 선생들께서 인촌 선생과 함께 키우시고 겪으시고 한, 그런 고난이요, 고난의 역사입니다. 동아일보 50년사를 일관해서 내려오는 기둥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촌 선생이 동아일보를 창간할 때 제정한 이른바 3대 사지社志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아일보의 정신이요, 동시에 인촌 선생이 동아일보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치 기구가 없었던 50년 전에 이 민주주의를 들고 나섰다는 것은 참으로 경복해서 마지않을 선견지명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동아 창간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라는 없고 정부도 없지만 이것은 국체나 정체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라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 의무를 주장함입니다.
이 대 원칙을 내건 인촌 선생을 비롯한 창간 당시 동아일보 간부들의 정대하고 공명하고 심오한 철학에 우리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동아일보 2020위원회 교열, 자립자강하여야 한다, 동아일보, 2011년, 96~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