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81호)
창간초기부터 경리·영업 책임맡아
국태일(鞠泰一, 1898∼1961)
국태일은 경리와 영업부문 책임자를 거쳐 14년간 발행인으로 일했다. 전남 담양 출신인 그는 담양공립보통학교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동아일보 경리부 서기로 입사해 1931년 경리부장, 1939년 영업국 차장과 영업국장에 올랐다. 1947년 전무 겸 발행인에 취임해 1961년 5월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14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경리와 영업부문의 임원이 장기간 발행인을 맡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동아일보 사사(社史)는 그에 대해 “1947년 2월 본보 발행인 전무로 취임한 이래 14년간 본보와 고락을 함께 하면서 6·25동란을 전후한 고난기를 극복하고 제일가는 대신문으로 발전시키는데 주석(柱石)의 대임(大任)을 다하였다”고 평했다. 일제가 신문용지 불법유통과 경리부정이라는 트집을 잡아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를 강제폐간할 때, 국태일 영업국장도 백관수, 송진우 등과 함께 구속됐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폐간과 복간, 6·25전쟁을 모두 겪은 몇 안 되는 간부 중 한 명인 셈이다.
국 전무는 영업에 대한 소신도 분명했던 것 같다. 건국 초기, 그는 동아일보 법인세를 자진납부했다. 김진섭 씨(사진부)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문이 복간되어 돌아가고 있으면 회사로서는 당연히 세무보고를 하고 기왕이면 자진납부하는 것이 도리이다. 건국의 기쁨을 맞아 자진납세 제1호가 된다면 이보다 더 보람이 있겠느냐.”(녹취 한국언론사)
심규선 (동우회보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