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5호)
重刊과 함께 중흥 이끈 ‘CEO 3총사
4·26교수단 데모 앞장…서울대 교수 퇴임후 취임
이희승(李熙昇, 1896~1989)
1963년 여름, 동아일보사 최고 지도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최두선 사장이 재임 16년 6개월 만에 사임하고 후임으로 서울대 이희승 교수가 취임했다. 서울 태생인 일석(一石) 이희승은 중앙학교를 거쳐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했다. 1932년부터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는 동시에 조선어학회에서 국어 연구를 해온 국어학자요 시인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피검돼 옥고를 치르다 1945년 해방으로출옥했다. 이후 서울대 교수, 대학원장, 문리대학장을 거쳤다. 1960년 4·26 교수단 데모 때 선두에 서서 4·19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 서울대를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지내다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것이다.
일석이 최두선 사장 후임으로 오게된 데는 인촌의 아우 김연수의 권유가 있었다. 김연수와는 중앙학교 동창으로 일석은 경성제대 입학 전에 김연수가 경영하는 경성방직 직원으로 일했다.
제11대 사장으로 선임된 이희승은 재임 2년 동안 민정이양, 한일협정의 소용돌이, 언론파동 속에 고희에 가까운 노령에도 강직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으로 말많은 언론사를 잘 이끌어 나갔고, 그의 주장인 한글 맞춤법을 신문 제작에도 적용했다.
사장 임기는 원래 3년이었으나 그는 1965년 7월 말 정기주총에서 대표이사 사장직을 사임했다. 동아를 떠나면서 이희승은 “재직 2년 동안 동아일보에 플러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겸손한 평가를 내리고, 그 스스로의 개인생활도 2년 동안 완전한 공백이어서 임기 1년을 남겨두고 용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대 대학원장, 성균관대 대학원장,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하고,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인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았다. 1994년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