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2호)
지식과 필력 갖춘 ‘근대여성의 선봉’
본보 첫 여기자 부부함께 근무…
북한정부 수립 참여
<허정숙(許貞淑) 1902~1991>
함북 명천 출생. 일본 메이지대 법과 출신 변호사로 항일 운동가들을 변호하고 자금을 대주어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허헌(許憲)의 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배화여고를 마치고 일본 고베신학교에 진학한 허정숙은 1920년 여름방학때 귀국했다가 눌러앉아 조선여자교육협회에 가담해 여성 계몽운동에 나선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상해에서 돌아온 후인 1924년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조직한다.
1925년 첫 남편 임원근이 근무하던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부부가 한 신문사에 근무하게 된다. 동아일보 첫 여기자였다. 이후 부녀부,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입사 초기, 인도 국민회의 의원이며 시인인 사로지니 나이두의 영문시를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남자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통이 불편한 농촌 현장 취재에도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박헌영의 ‘철필구락부’ 임금투쟁에 가담해 1925년 5월에 모두 회사를 떠났다. 게다가 임원근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자 허정숙은 이듬해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학예부 기자 시절 허정숙은 ‘수가이’(秀嘉伊 sky)란 필명으로 ‘국제부인데이에- 3월 8일은 무산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는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27년 말에 귀국한 허정숙은 근우회에 가입,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부인운동과 부인문제 연구’는 당시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마르크스 사회이론으로 파악한 대표적인 글이다.
1929년 광주학생만세운동 이후 경성 학생시위를 주도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기도한 혐의로 체포된 허정숙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셋째아들 출산으로 보석됐다가 재수감되는 등 구속과 출소를 거듭한 그는 1932년 만기출소 후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결심하고 1936년 최창익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공산당 산하 항일군정학교 정치군사과에 입학했을 때 허정숙은 이미 마흔이었다. 팔로군 정치위원으로 전선에 배치된 그는 무정, 김두봉 등 연안파와 긴밀한 관계였다. 1945년 12월 귀국한 그는 평양으로 월북해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문화상, 사법상,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 연안파 중에서는 드물게 88세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가족과 달리 6·25때 남한으로 내려온 작가 허근욱은 이복동생이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