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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41> 조동호

Posted by 신이 On 10월 - 6 - 2020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9호) 

항일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해외특파원  

 

 

봉천특파원, 孫文기사 쓰면서 용기있게 한국志士 언급

 

 

 

 

 

 

 

<조동호(榴亭 趙東祜), 1892∼1954>

“아,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제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英姿(늠름한 모습)를 한성에 나타낼까”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 특파원 조동호가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1면에 손문의 북경 방문 뉴스를 전하면서 기사 말미에 쓴 내용이다. 손문이 13년을 해외로 떠돌다가 마침내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 쓴 글이다. 초창기 동아일보와 기자들의 용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정 조동호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1910년 19세 때 6세 연상의 몽양 여운형을 만나 평생 동지가 된다. 1914년 12월 두 사람은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 들어가 수학한 뒤 1918년 상해에서 장덕수 이광수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했다. 청년학생을 교육하고 그 당원을 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인 1919년 상해임정이 수립될 때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등 29인의 임시의정원이 구성됐는데, 몽양과 유정도 그 일원이었다. 조동호는 그해 안창호 이광수 등과 함께 임정기관지로 상해판 독립신문을 창간, 한글활자를 제조하고 많은 논설을 집필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조동호는 1923년 귀국, 이듬해 5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홍명희 정인보 등과 논설반에 근무하면서 상해임정과 만주동포 등 중국관련 기사와 논설을 주로 집필했다. 중국내전이 발발하자 봉천특파원으로 중국에 파견돼 ‘戰地行’이라는 종군기를 20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중국내전이 우리민족에 미치는 영향이 주 내용이었다.

이때까지 민족계열의 항일운동에 헌신하던 조동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면서 동아일보를 떠난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된 그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교섭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가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활동했다. 이미 일제의 표적이 된 조동호는 1928년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나 1934년 또다시 공산당 재건관련 사건으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4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몽양과 함께 조선중앙일보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1944년 몽양이 주도한 조선건국동맹을 거쳐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으나 박헌영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후 활동이 침체기에 접어든다. 유정정치학교를 열어 후배 정치인 지망생을 위한 교육 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면서 1954년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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