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1호)
만주 월남 버마서 散花한 ‘동아 기자정신’
한국 언론사상 첫 순직…
간도 독립군 취재중 28세로 운명
<장덕준(張德俊) 1891~1920>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립과 깊게 연관돼 있다. 황해도 재령 태생으로 1914년 ‘평양일일신문’의 조선문판(版) 주간으로 있던 장덕준은 1915년 일본 유학을 떠났으나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장덕준과 함께 유학했던 낭산 김준연의 회고에 따르면, 장덕준이 1919년 여름방학 직전 자신을 찾아와 신문 발간의 필요성과 계획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장덕준은 이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낸 이상협과 연락하면서 신문 허가를 위해 도쿄제국대학 교수 등 일본인들과의 교섭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생 장덕수의 대학(일본 와세다대) 선배인 김성수를 만나 동아일보 창간에 힘을 합치게 된다.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후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직했다. 논설반에는 장덕준과 이상협 외에 진학문, 김명식, 박일병이 있었다. 장덕준이 통신부장과 조사부장을 겸직한 것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최남선, 현상윤 등의 인사들이 풀려나오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배려였다.
논설반원 장덕준은 추송(秋松)이란 호로 1920년 4월 2일자부터 13일까지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란 논설을 썼다. 3·1독립운동에 대한 일본 여론을 소개하고 이를 비평한 것이다.
장덕준은 1920년 7월 말 북경으로 떠났다. 공식적인 출장 목적은 중국의 정세 취재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방문 미국 의원단이 7월5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홍콩,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동아일보가 장덕준에게 미 의원단 취재도 함께 맡겼다.
장덕준은 7월 28일 만주 봉천(奉天)총영사관을 찾아가 북경 가는 사유를 말하고, 장작림(張作霖)의 독군서(督軍署)를 방문하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동아일보 1920. 8.9). 장작림과의 인터뷰는 8월 13일 진행돼 8월 20일과 21일자에 ‘동란의 북경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장덕준은 이어 8월 15일 베이징에 도착한 미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와, 18일에는 의원단장 스몰을 인터뷰하고 서울에 도착하면 한국인 환영회에도 참석해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8월 24일자 3면에 크게 보도했다.
장덕준은 10월 중순 ‘훈춘(琿春)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 간도로 향한다. 유광렬은 “당시 동아일보는 정간중이었으나, 장덕준은 동포가 대량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보도기관으로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간도를 향해 떠났다”고 회고했다.
훈춘사건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일본이 만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마적단을 이용해 9월과 10월에 연달아 일으킨 사건이다. 훈춘, 연길, 왕청, 화룡 등 각 현에 병력을 침입시켜 독립운동 단체를 습격하고 대규모 살육을 자행한 사건이다.
장덕준은 11월 1일 용정에 도착해 각지를 둘러보고, 11월 6일에는 용정촌 파견 헌병대장 와타나베 대위를 방문해 토벌상황을 청취했다. 이날 오후 용정촌을 출발해 밤 10시경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장덕준이 조선인 학살사건을 항의하자, 일본군 측이 공동조사를 하자며 수 명의 일본 헌병과 함께 현지답사를 떠났다. 그 후 헌병은 돌아왔지만, 장덕준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나이 28세, 한창 살 시기였다.”(김을한 신문야화, 일조각 1971년, 41쪽).
동아일보는 1921년 속간 이튿날인 2월 22일자 1면에 ‘추송 장덕준을 사(思)하노라’는 사설을 게재하면서 그의 실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실종된 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 추도식을 거행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