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9호)
항일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해외특파원
중국공사에게 ‘본보 密書’ 전달 만보산사건 진상 밝혀
<서범석(徐範錫), 1902∼1986>
‘만주사변 발단으로 北中 시국이 다단하게 되어 奉天에도 특파원을 상주시킬 필요를 절감하여 신의주특파원 서범석군을 특파하기로 했으니 금후의 본지는 중국통신에 더욱 이채를 발하게 될 것이며, 在滿동포에게는 많은편익을 줄 것입니다’(동아일보 1931년11월29일자 1면)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북경대를 수료한 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에서 기자 경력을 쌓은 서범석이 동아일보 신의주특파원(국경특파원이라고도 했으며, 신의주와 압록강 건너 지금의 단동을 중심으로 취재)에서 봉천특파원이 된 상황을 알려주는 기사다. 3·1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했던 항일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서범석이 기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만보산사건 관련취재였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7월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수로공사로 인해 충돌한 사소한 사건이었으나, 한국인이 중국인과 중국관헌에 의해 습격 받았다고 부풀러져 국내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송진우 사장이 “이것은 한중간의 감정을 이간시키려는 일본의 침략적 음모가 개재된 것일지도 모르니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판단, 보도를 절제하는 한편, 서 특파원의 현지기사와 함께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라는 사설로 우리 국민들을 진정시키기에 힘썼다.
이런 노력으로 중국인에 대한 대규모 보복을 하려던 국내의 기세도 차츰 누그러들었다.
당시 장개석 정부에서는 왕영보 주일공사를 한국에 파견해 진상조사를 하게 할 정도로 민감한 상황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귀임하는 왕 공사가 탄 열차가 신의주를 통과할 무렵, 서범석이 일경의 눈을 피해 왕 공사가 있는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범석은 담배를 싸는 얇은 종이에 한자로 쓴 메모를 손에 쥐어주면서 “이것은 동아일보가 주는 것이요”라고 하고는 얼른 나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순간이었다. 이같은 동아일보의 신중한 태도와 노력으로 중국측도 일본의 의도를 간파하게 돼 동아일보에 대해 특별히 호의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범석은 1950년 무소속으로 옹진 갑구에서 출마, 당선돼 국회의원이 된 이래 1973년 정계은퇴할 때까지 6선을 기록하며 야당정치인으로 일관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