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1호)
만주 월남 버마서 散花한 ‘동아 기자정신’
1966년 베트공 출몰지서 車사고…
4개국어 능통 언어鬼才
<백광남(白光男) 1935~1966>
백광남은 1966년 10월 주월특파원으로 부임해 활동하다 두 달도 채 안된 11월 28일 베트콩 출몰지구인 디안부근에서 취재를 마치고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동아일보 두 번째 순직기자로 당시 31세였다. 월남전에 종군한 한국기자 중 처음이자 마지막 순직기자였다.
백광남은 신의주 출신으로 부산고와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를 졸업하고 1960년 4월 수습 2기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수습 동기는 김원기(전 국회의장), 이진희(전 문공부장관), 이원우, 정형수(전 주일한국대사관 공사), 신동호(전 KBS제작단 사장) 등이었다. 고교 동기인 정형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부산고 출신들은 대부분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했는데, 백광남은 유독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싶다며 외국어대 노어과로 진학했다고 한다(동우지 1966년 12월 제30호).
외신부 수습을 거쳐 방송뉴스부의 중앙청 출입기자로 있던 백광남은 다시 편집국 외신부에서 근무했는데, 어학 재능은 외신부에서도 남달랐다. 영어와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독일어 불어까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장차 희망도 파리 특파원이었다.
그런데 주월 특파원을 자원한 것은 신문기자로서 전 세계의 이슈가 되고 있는 월남전을 자신의 눈
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전 취재로 순직한 외국기자가 16명이나 되는데도 순직한 한국기자는 한명도 없었다며 부끄럽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월남으로 가기 전 그는 월남어를 배우고 오토바이에 무척 욕심을 냈다고 외신부 동료들은 기억한다. 교통사정이 열악한 월남에서 오토바이로 취재를 다닐 생각이었던 그는 11월 27일 디안 소재의 국군 비둘기부대 취재를 마치고 모터사이클로 단신 귀환하던 중 월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해 숨졌다.
12월 3일 그의 유해가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와 12월 5일 동아일보사 장(葬)이 광화문 본사 앞에서 거행되었다.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본사는 그에게 외신부장대우를 추서하고 그 후 10년간 해마다 인상분이 반영된 봉급을 지급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