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73호)
잡지기자 3인 ‘손기정 다리’만 게재…일장기 말소 ‘묘수’
본지에 기고 계기로 부부 함께 파격 입사
신동아 근무
<최승만(崔承萬, 1897~1984)>
“동경 YMCA 건축기금을 모집하는 데 많이 도와주신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에게 귀국인사를 하러 갔다. 나를 위해 사회사업 방면 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얼마 후 기별이 왔다. 먼저 말했던 일은 뒤로 밀고 우선 ‘신동아’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사령은 잡지부장으로 하겠으며 집사람은 신문학예부 기자로 채용하겠으니 특히 가정에 관한 글을 담당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청한 일도 없는데 먼저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 출판부 1985년)
동아일보 1926년 12월 11일자에는 관동대지진으로 불타 폐허가 된 동경 기독청년회관 재건을 위한 국내의 지원을 호소하는 동경기독청년회 총무 최승만의 글이 실렸다. 동아일보는 이같은 애국심을 높이 샀고, 이후 이 부부를 동시에 입사시키는 파격적인 인사가 있었다. 최 씨의 이어지는 회고.
“신동아 편집실은 멀리 무악재가 보이는 3층에 있었다. 고형곤 씨와 나는 주로 편집 일을 보았고, 최영수씨는 만화를 맡았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신문과 잡지 편집자들이 모여서 토의했는데, 다른 신문사보다 특수한 기사가 무엇이며 또 어디가 신속히 보도되었느냐를 얘기했다. 경제부장 고재욱, 사회부장 현진건, 조사부장 이여성씨가 참석해 잡지에 관해 의견을 말했다. 총독부가 검열하던 때여서 글자 하나 쓰는데도 적지 않은 신경을 쓰게 되어 그야말로 살얼음 딛는 심정이었다.”
당시 검열관은 니시무라(西村眞太郞)라는 총독부 관리였다. 동경관립외국어학교 조선어과를 나와 우리말을 잘했다. 최승만과 니시무라는 외국어학교 동창이었다. 그런데도 만나자마자 최승만에게 “자네 빨갱이군” 하면서 무시했다. 최승만은 노어과 출신이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길용, 이상범, 현진건, 신낙균, 최승만과 사진반 송덕수씨 등 8명이 경기도 경찰부에 잡혀 들어갔다.
최승만은 이 사건으로 신동아와 신가정이 더 이상 나오지 못하자 동아일보를 떠났고, 부인 박승호는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학예부 기자로 일했다. 최승만은 이후 경성방직 서무과장을 지내다 해방 후 미 군정청 문교부 문화국장을 맡았다. 연희대 교수를 거쳐 제6대 제주도 도지사(1951.08~1953.11), 이화여대 부총장을 지낸 후 1956년 인하공과대학 학장을 4년 8개월 역임했다. 1984년 88세로 별세했고, 부인 박 여사는 6·25때 납북돼 1978년 12월에 사망했다.
– 글 · 김일동(동우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