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7호)
1922~47년 재직 ‘골수 동아맨’ …
‘횡설수설’ 칼럼 紙價 올려 – 설의식
<설의식(小梧 薛義植, 1901∼1954)>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편집주간을 지낸 소오 설의식은 1922년 동아일보에 입사, 일장기 말소사건과 1940년 강제폐간 시기를 제외하고 1947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청·장년기를 동아에 몸바친 ‘동아맨’이었다. 설의식은 자신의 저서 ‘화동시대’ 서문에서 동아일보와의 운명적 인연을 회고하고 있다. 즉, 그가 근무하던 당시 동아일보 화동사옥은 그가 공부했던 중앙학교 자리였으며, 중앙학교의 교실이었던 곳에 사회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오의 중앙학교 시절 교장이 송진우였는데, 동아시절 사장이 바로 그 송진우였다.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설의식은 2년7개월 만에 사회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동경특파원, 편집국장대리를 거쳐 1935년 편집국장에 오른다. 설의식은 단문을 잘 쓰기로 소문이 났다. 그의 글은 촌철살인의 함축성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동아일보의 ‘횡설수설’은 원래 이상협이 창안한 것인데, 그가 조선일보로 옮겨간 후로는 소오가 도맡아 집필했다. 횡설수설은 조선일보의 ‘만물상’, 중외일보의 ‘반사경’ 등과 함께 유명칼럼이었으나 소오의 횡설수설 칼럼이 단연 뛰어나 독자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소오는 또 신동아에도 단평란 ‘正視斜視’를 두어 매월 시사문제를 알기 쉽게 논평·해설해 인기를 끌었다. ‘신동아’라는 제호를 붙인 사람도 소오였다. 심지어 1925년부터 36년까지 동아일보 사고문은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한 그였지만 일장기말소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편집국장 취임 1년 남짓만인 1936년 8월이었다. 언론계를 떠난 소오는 광산일에 종사하면서 단파라디오를 통해 얻은 일제의 전황과 시국변천 정보를 몰래 송진우에게 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동아일보가 해방후 복간되자 설의식은 다시 주간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9년만이었다. 1945년 12월1일자에 실린 중간사(重刊辭) ‘主旨를 宣明함’의 집필자는 막 복직한 ‘평생 동아맨’ 설의식이었다.
– 글 황의봉(동우회 편집위원장 )